노력해도 나아지지 않는 관계
언제나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우리나라를
떠나 일본 키타큐슈라는 낯선 곳에 새로 터전을 일군 지 삼 년이 지났습니다.
일도 맘에 들고 근무 환경도 나쁘지 않습니다. 함께 일하는 일본 동료들 대부분이 친절하고 배려심이 깊어 별다른 문제없이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
딱 한 사람이 걸립니다.
제가 이전 글에서 몇 번 언급했던 일본인 여자 상사 핫토리 씨입니다. 제가 수출 책임자이고 그는 수출할 물건들을 일본 국내에서 구매하는 업무의 책임자이기 때문에 일적으로 엮이지 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 회사는 양질의 물건을 보다 값싸게 구매해서 보다 비싸게 수출 판매해 이윤을 추구해야 합니다. 따라서 저의 주요 임무는 시황을 잘 분석해서 적기에 좋은 가격에 수출 판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직급상 그가 상사이기는 하나 주어진 역할과 책임 분야가 달라 일방적인 지시와 통제의 관계는 아닙니다. 일본 내 시장 상황과 해외 가격 동향 등을 잘 살펴 상호 긴밀히 협의하며 최적의 거래가 이루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관계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아이템은 스테인리스 제품의 원료가 되는 스테인리스 스크랩(고철) 그리고 철강 제품의 원료가 되는 철스크랩입니다. 바이어는 저희 스크랩을 사서 고로나 전기로에서 녹인 후 일련의 과정을 거쳐 스테인리스 스틸이나 철강 제품을 생산합니다.
수출 계약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해외 바이어들에게 우리의 가격 조건이 담긴 견적서를 보내야 합니다. 보통 이메일로 간편하게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견적을 내기 위해서 저는 구매를 총괄하는 그의 일본 국내 시황(시장 상황) 정보를 듣고 현재 우리가 어느 정도 수준에서 구매를 하고 있는지 그래서 얼마에 판매를 해야만 하는지 의견을 듣습니다. 저도 역으로 현재 해외 시장의 동향을 알려 주고 어느 정도 선에서 견적을 내야 합당하며 계약이 성사될 수 있을지 정보를 제공하고 분석 의견을 알려 줍니다.
이런 과정은 수출 회사에서 물건을 판매하기 위해 거치는 지극히 일반적인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 일반적인 과정을 진행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많이 느끼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일본 시황에 대한 그 상사의 정보가 제가 조사한 정보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가 기대하는 판매 가격 수준이 지나치게 높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제가 알고 있는 정보 - 사내의 구매를 담당하고 있는 영업 담당자들에게 얻은 정보 혹은 시황 정보지에서 얻는 정보 - 를 이야기하면 그는 잠시 주춤합니다. 그러나 이내 정색을 하며 제 정보가 잘못되었다고 부정하거나,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 하는 경우에는 은근슬쩍 넘어가는 화법을 사용합니다.
거래처에게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가격 정보를 안내해 줘야 하는데, 항상 가장 드문 케이스, 그러니까 우리한테 가장 유리한 높은 시장 거래 가격의 예 혹은 그럴 거라는 추정하는 높은 가격 정보만을 저에게 전달하려고 합니다.
처음에는 저의 일본어 구사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제가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이 큰 원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저의 일어 실력이 아주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시장 가격에 대한 정보는 수치로 나오기 때문에 그 정보가 옳은지 그른지 비교적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습니다.
회사의 입장에서는 물건을 보다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것이 당연히 이익입니다. 그러나 바이어들과 수십 년을 이어가는 장기 협력 관계에서 우리가 공급하는 일본의 시장 정보나 우리의 가격 수준이 사실과 다르다면 둘 사이의 신뢰에 금이 갑니다. 바이어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소스들을 통해서 정보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각 채널마다 정보가 다를 수 있고 가격 수준도 완전히 같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보가 자주 잘못된 것으로 판명 난다면 거래 상대방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요?
아마도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가장 높은 가격 혹은 거기서 좀 더 살을 붙여 알려 주면 제가 그 정보를 바탕으로 보다 좋은 가격에 수출 판매 계약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회사의 이익을 생각하는 그 마음만큼은 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적극 지지합니다. 그러나 저를 진정 같은 회사의 동료이고 한 팀으로 생각한다면 정확한 정보를 솔직하게 공유하고 거기에서부터 제가 합당하게 거래처와 가격 협상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부 정보를 듣고 거래처에 열심히 설명했는데 제가 한 말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면 그것도 계속해서 이런 모습으로 비친다면 저는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지난 3년 동안 이분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의아해하며 좋은 말로 부탁해 보기도 하고 때로는 신경질이 나서 언성을 높여 싸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그의 태도는 시종일관 바뀌질 않네요. 올해 우리 회사에 경력으로 들어온 후배 Z도 그와 몇 개월 일을 같이 해보더니 혀를 내두르고 있습니다. 제가 느꼈던 것을 이 후배도 똑같이 경험한 후에 확실히 그가 다른 동료들과 의사소통하고 관계를 맺는 데 있어 문제가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일에서 자꾸 이런 실망을 하게 되니 사람마저 미워지고 인간적으로도 거리가 생기는 느낌입니다. 앞으로 오랜 시간 함께 얼굴을 맞대고 협력하며 일해야 하는 사이임에도 그 간극이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친구가 되고 싶었는데 저는 그분에게 그런 존재가 아닌가 봅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저 공식적인 관계 이상의 연을 맺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욕심이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
더 시간이 흐르면 저의 진심을 알아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