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이 되고 싶지 않아요!
요새 회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 임원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전과 같지 않다. 예전이라고 하면 상대적이겠지만 개인적으로 IMF 외환위기가 오기 전, 그러니까 90년대 중반 이전을 이런 관점에서 예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은 정확히 2000년이었다. 그러니까 위의 기준으로 하면 내가 첫 직장을 다니던 시기는 이미 임원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 이후가 된다.
첫 직장이었던 모 경제지 언론사를 우여곡절 끝에 몇 개월 만에 그만두고 약간의 공백을 지나 새로 들어간 두 번째 직장은 종합상사였다. 언론사와는 조직도가 사뭇 다른 곳이었다. 언론사가 다수의 평기자들과 데스크를 맡은 부장급 그리고 그 위의 임원들도 나뉜 데 반해, 종합상사와 같은 대기업은 사원부터 시작해서 대리, 과장, 차장, 부장, 이사, 상무, 전무 등 순차적인 직급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인원수도 언론사에 비해 훨씬 많았기 때문에 대기업에서의 임원의 위상은 그 당시 갓 입사했던 신출내기의 눈에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한 대단한 존재로 비쳤다.
그러나 이미 외환위기를 거치고 막 다시 몸을 추스르고 있던 회사의 선배들의 입장에서는, 접대비나 회식비 등판공비 예산이 풍요롭고 각종 복지조건이 좋았던 '예전'의 호시절은 물 건너간 것이었다. 적게는 7명 많게는 15명 정도의 팀원으로 이루어져 있던 한 팀의 팀장만 되어도 예전에는 대단한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회사가 속한 그룹이 해체되고 공적 자금이 투입되고 채권은행들의 눈치를 보며 일을 하게 된 그 당시에는 직원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보통 3~5개의 팀들을 묶어 한 본부를 이루었는데 본부를 총지휘하는 본부장의 직책은 이사나 상무 이상의 임원들이 임명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종합상사에서 본부장쯤 되면 해외 지사나 법인 경력이 서너 차례 이상되는 해외 시장 베테랑인 데다가 한 본부 40~60명가량 되는 인원들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상당한 위치에 있었다. 비록 선배들이 말씀하시던 호시절의 위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회사에 들어온 이상 임원이 되고 본부장 정도의 직책에 올라서는 것을 꿈꾸지 않는 직원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우리 본부장 별명은 '김대리'
옆집 본부장은 '독사'
회사에는 여러 본부들이 있었고 그 본부를 맡고 있는 본부장들의 스타일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런데 같은 본부의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서로 다른 본부에 흩어져 일하는 동기나 지인들과 얘기해 보면 자기 본부장을 좋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자기 본부장을 '김대리'라고 칭하면서, PPT 글씨체를 고치라는 둥, 폰트를 바꾸라는 둥, 레터 첨삭지도를 한다는 둥 임원이 대리/사원과 똑같이 실무자가 하는 일 하나하나 간섭한다고 불평하는 정도는 애교였다. 보고를 들어간 직원한테 보고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재떨이를 던진다거나, 막말 세례를 퍼붓는다고 욕하기도 했고, 일은 열심히 안 하고 매일 안테나만 세우면서 인사이동이나 해외 지사/법인 발령 같은 소식에만 열을 올린다고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공은 내가 먹고, 과실책임은 니들이 져라!
실망을 하고 좌절을 느끼게 하는 못난 임원들 가운데 특히 그 정도가 심하게 느껴지던 타입 중 하나는 공은 가로채고 업무 과실의 책임은 부하에게 전가하는 유형이었다. 대개는 한 팀 혹은 한 본부가 좋은 성과를 거두면 담당자로부터 팀장, 본부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칭찬을 받고 인사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 평소 성격이 괴팍하고 모난 성격의 임원도 성과가 좋으면 자기 휘하의 부하들과 기쁨을 나누고 나름 부하들을 챙기고자 한다. 따라서 평판이 좋지 않은 임원이라 하더라도 여간해서는 부하의 공을 가로채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가끔 이런 인간도 있기는 있었다. 우리 조직에도 남의 조직에도. 그야말로 최하류다.
문제는 어떤 계약 관련해서 사고가 터지거나 손해를 크게 보는 경우였다. 좋을 때보다는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서 리더의 인품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리더의 자질이 어느 수준인지 잘 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회사를 다니다 보면 가끔 이러한 대형 사고가 터지고 회사에 큰 손실을 끼치게 되는 사건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전의 글 '직장 상사들께 하고 싶은 말'이라는 제목의 글로 그런 예를 언급하 바 있다.) 이런 일이 가능하면 없어야겠지만 일을 하다 보면 부득이 부딪히게 마련이다. 어떤 본부장은 사고나 클레임의 보고를 받으면 얼굴색이 어두워지고 대충 보고를 받고는 팀장이나 그 관련 부서에서 알아서 무조건 문제를 해결하도록 떠넘겼다. 어떤 본부장은 사건의 경위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화부터 내면서 보고하는 부서 담당자들을 감정적으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자기는 그런 보고 제대로 받은 적 없다며 도마뱀이 제 꼬리를 자르고 달아나는 못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H.Y. 상무는 달랐다.
부하가 신나게 일하도록 배려하고
실패의 책임을 기꺼이 함께 지고자 했던 임원
수많은 임원들을 가까이에서 조금 떨어져서 겪을 수 있었다. 그 가운데 내가 롤모델로 삼고 싶다고 생각한 분들이 많지는 않았다. HY상무가 생각난다. 자그마한 키에 쌍꺼풀 없는 작은 눈. 까무잡잡한 피부. 외모로 보자면 그리 어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와 함께 일해 본 사람들은 인정할 것이다. 자연스런 당당함이란 어떤 것인지, 괜찮은 리더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는지 그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본부는 거의 십 수년간 좋은 실적으로 소위 잘 나가는 본부였다. 세계 원자재 경기가 한참 호황을 누리면서 철강원료와 반제품 그리고 비철을 취급하던 우리 팀과 본부를 지휘하던 팀장들과 본부장은 이 시절 좋은 고과를 받고 진급도 제때 잘 하며 수혜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10년을 기점으로 철강 경기도 꺾이고 각종 원자재의 거품이 빠지면서 본부의 실적도 부진일로를 걷게 되었다. 다른 회사들이 리스크를 고려해 많이 진출하지 못했던 이란 비즈니스에서도 십 년 가까이 우리 팀과 본부는 엄청난 이익을 구가하다가 미국과 UN의 경제제재 조치를 받은 이후 이 비즈니스도 문을 닫아야만 했다.
HY상무는 이런 끝물에 우리 본부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사령탑을 맡게 된 그에게 좋은 기회가 오기를 바랐고 실적이 나아지기를 희망했다. HY상무 본인도 그 시기가 본인에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은 시간임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평하거나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리더로서 직원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일'을 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는 역할을 자처했다.
종합상사의 특성상 한 보직에 아주 오래 머물러 있지는 못한다. 따라서 팀장이든 본부장이든 자기가 그 자리에 있을 때 실적이 잘 나와야만 고과도 잘 받고 승진도 잘 되고 좋은 해외 지사/법인에도 발령을 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본인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리스크 관리'라는 명분으로 딱 돈이 되고 안전한 비즈니스만을 취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HY상무는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하고 새로운 삼국간 무역을 시도하고자 하는 팀과 담당자들의 의기를 꺾지 않았다. 어떤 안건이든 아이디어든 일단 들어주었고 가능하면 직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도록 시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중국에서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HY상무 휘하의 한 팀에 배속되었던 나는 당시 사고만 많고 골치가 아파 다들 꺼려하던 철스크랩 비즈니스를 맡아 고민이 많았었다. 만일 그가 보신주의자였다면 철스크랩 비즈니스를 하도록 놓아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일 욕심이 있었고 남들이 힘들다고 어렵다고 꺼리는 것도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로 대처하곤 했다. HY 본부장의 배려로 나는 근거리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미국이나 중남미 철스크랩의 아시아향 판매도 검토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스크랩 비즈니스를 시작하고서 그리 성과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상사의 특성상 물건을 공급하는 공급선의 입장도, 물건을 구매하는 철강회사의 입장도 아니었기에 시세에 따라 공급선이 도망가기도 바이어가 도망가기도 하는 어려움이 큰 비즈니스였다. 그러나 HY 본부장을 비롯해 내가 속한 팀의 팀장은 나를 믿고 나의 최선을 믿고 일이 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내해 주었다.
지금 스크랩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올 수 있었던 계기도 그때 마련이 된 것인데 아쉬운 것은 나를 믿고 지지해 주었던 상사들께 좀 더 보답을 하지 못하고 이직을 하게 된 것이다. 내가 회사를 떠난 이후에도 팀장과 본부장의 소식은 직접 혹은 전 동료들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어려운 환경을 잘 극복하고 팀장은 올해 이사로 승진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HY 본부장은 몇 해 전 유럽지역의 한 법인장을 마지막 임기로 옷을 벗었다고 들었다.
그가 본사에 있을 때 그를 모시던 부하들 그리고 해외법인에서 그와 함께 했던 주재원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한결같았다. 트레이딩을 하는 영업 직원이 진취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가급적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그 일을 될 수 있을지 윗사람으로서 해줄 수 있는 역할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일이란 잘 되다가도 안되고 안되다가도 잘 되는 법이니 매 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기보다는 보다 긴 호흡으로 바라보고자 애쓰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하다가 혹시 클레임이 터지거나 크고 작은 사고들이 터지더라도 무조건 담당자들을 질책하기보다는 합리적인 평가와 분석을 통해 문제를 시정해 나가려는 노력을 기울이고자 했다.
따뜻하고 강한 리더를 한 번은 경험해야 한다!
조직에는 호인만 있어서는 안 된다. 잘못된 것은 따끔하게 지적하고 비판할 줄 아는 사람도 필요하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 회사라는 이익집단이 마냥 좋은 게 좋다고 하고, 친절하고 따뜻한 모습으로만 굴러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전쟁터와 같은 곳에서 온 몸과 마음이 긴장과 스트레스로 경직되어 일하는 곳에서 HY와 같은 상사, 리더 밑에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축복이자 비전의 제시였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같은 시간으로 더 나은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행운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조직에서 강하고 추진력 있으나 한편으로 긍정적이고 따뜻한 리더를 그런 임원을 한 번쯤은 경험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손끝과 피부로 깨닫는 이상적인 나의 미래를 가늠해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국을 떠나 낯선 조직 환경에서 다시 시작된 나의 항해는 미지의 뱃길을 따라 출렁이며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은 등대의 불빛처럼 다가와 내가 나아갈 방향을 비춰주곤 한다. 언젠가 연락이 닿으면 때늦은 감사의 마음을 건네며 이야기 나누게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