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은 많은 생각에 잠긴 날이었다. 회사에서 겪었던 일 때문에 마음이 심란했고 지난밤에는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힘이 없어 자리에 일찍 누웠는데 새벽 일찍부터 제대로 쉬지 못한 상태로 눈이 떠지기도 했다.
남자들은 대개 밖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집에 와서 그런 이야기를 잘 털어놓지 않는 경향이 있다. 특히 가족들이 걱정할 것 같은 일들은 혼자서 생각하며 가족들에게 자세히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싶다.
"나 걱정 많소. 나 힘들어" 하고 빤히 보이는 얼굴
나 역시 그런 남자들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문제는 말만 안 할 뿐이지 얼굴 표정에 다 드러난다는 거다. 어제오늘 역시 근심에 쌓인 나의 얼굴 표정과 축 처진 어깨는 눈치 빠른 아내에게 말보다 더 강한 느낌을 전했나 보다. 저녁을 먹고 지난번 아내의 생일에 선물로 사준 옷이며 겨울 슬리퍼 등을 바꾸러 한 의류 매장에 다녀온 후 아내가 집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잠시 걷자 한다.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왠지 오랜만에 아내와 단둘이서 커피 한 잔을 하고 싶었다.
"여보, 우리 요 아랫동네에 있는 코메다 커피에서 차 한 잔 하고 올까?"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가서 커피 한 잔 하자."
다행히 장모님이 와 계셨기 때문에 아기를 장모님께 맡기고 우리는 실로 오래간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커피 전문점은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세련된 인테리어의 도시적인 모습은 아니다. 나무 합판과 원목 등으로 실내 벽과 칸막이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가 꾸며져 있고 메뉴는 커피와 몇 가지 음료수 그리고 샌드위치와 롤빵 등 단출하다.
회사 후배와 이따금 출근 전 모닝커피를 하러 들르기도 하는 이 가게는 우리 동네에서는 그래도 귀한 커피 체인인 셈이었다.
아내와 창가 자리로 가 앉아서 커피 한 잔과 아이스크림이 곁들여져 나오는 롤빵 하나를 시켰다.
"당신 얼굴을 보니까 뭔가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아서 그냥 집에 들어가기보다는 산책이라도 같이 하고 싶었어요."
아내가 말을 꺼냈다.
"응, 그렇구나. 고마워요. 내 얼굴에 다 드러나지. 후훗."
내가 대답했다.
회사의 젊은 상사와 있었던 이야기를 잠시 아내에게 들려주었다. 상사는 수출 판매 책임자로서의 나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한국의 바이어와 가격 담판을 할 때 너무 유약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우리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 더 높은 가격을 받기 위해 처음부터 좀 강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데 이번 가격 협상도 그렇고 기본적으로 바이어에게 끌려다니는 형국이라는 비판이었다.
상사의 이야기를 유선상으로 전해 듣고 순간 좀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주요 고객사와의 가격 협상에서 좋은 결과를 낳았던 많은 사례들은 까마득히 잊히고 갑자기 최근 좀 빡빡해진 협상 분위기에서 양사의 입장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이 고객사에 끌려다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버렸다.
사실 이런 지적 자체가 문제였다기보다는 평소와는 전혀 다르게 갑자기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다짜고짜 따지는 듯한 전화기 저편 상사의 예상치 못한 태도가 조금은 충격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그가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을 말을 하면서 더더욱 감정적이 되는 것 같아 잠시 나도 감정적인 대응을 할 뻔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대화가 제대로 풀릴 것 같지 않아 일단 그의 말을 일부 수긍하기로 했다.
"아, 이사님, 제가 미처 그 정도 가격 수준까지 우리가 받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네요. 이사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우리가 이런 가격 상승장에서 좀 더 안전하게 물건을 확보하기 위해 그 수준까지 받아야 하는 것으로 분석하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우리 내부 구매 상황에 대해 좀 더 주의를 기울이고 판매 가격을 충분히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아내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진지하고 성의 있게 내 말을 들어준 후 말했다.
" 당신을 좀 도와주고 싶은데 이런 상황에서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안타까워요. "
올해 들어 새로 우리 가족이 된 어린 딸을 키우느라 분주하고 힘들게 살고 있는 아내가 나의 걱정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미안함과 안타까움이 섞인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말을 하지 않고 아내가 이렇게 내 걱정과 갈등을 나누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왕 얼굴에 드러나서 몸짓으로 들켜서 아내와 이야기를 하게 된 마당에 굳이 숨기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 당신 걱정하게 해서 미안한데 그래도 이렇게 당신한테 말로 털어놓으니까 기분이 한결 낫다.
고마워요 여보!"
아직 마음속의 짐은 다 내려놓지 못했다. 젊은 상사와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차이와 가격협상에 임하는 태도 및 접근방식의 차이가 하루아침에 좁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단지 마음과 머릿속을 휘저으며 어지럽히던 이야기를 담담히 꺼내어 아내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 혼란함은 많은 부분 정리가 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어떻게든 내 마음이 좀 편해지기를 바라고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자 애쓰는 아내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어깨가 더 탄탄해지는 것 같다고 할까. 든든한 받침대를 뒤에 하나 세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외롭지 않았다.
아내의 몸상태가 좋지 않아 먼저 자겠다고 하면서 한 마디 보탠다.
" 여보, 내 노트북 써도 돼."
이 말은 곧 내게 글을 써보라는 의미였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내게 잠들기 전 권하는 아내의 또 다른 배려였다.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 나는 오늘 밤 정신이 말짱하다. 잠은 좀 방해를 받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내와의 커피 한 잔이 꼭 필요했던 나이지 않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