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일본 국내 영업이다!
일본의 회사로 이직한 이후 주로 담당한 일은 해외 수출 관련 직무가 대부분이었다. 경력직으로 회사에 입사하면서부터 한국, 대만, 중국, 인도 등의 해외바이어들을 상대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자연히 일본 내 구매나 내수판매 관련 일은 거의 접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년부터 경영진으로부터 해외 수출 판매 쪽 일 뿐 아니라 일본 내 공급선을 직접 접촉해서 소싱하는 일까지 해보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일본 회사에 온 지 약 3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이거 현지에 왔는데 말이 왜 이렇게 안 늘지?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간단한 인사말도 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기 때문에 내수 영업은 감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마도 만 2년이 넘어가기 전까지는 언감생심 일본 기업을 직접 만나 미팅을 하고 거래를 트는 일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뭔 말이 통해야 일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서툰 수준이지만 일본 직원들과 매일 일어로 의사소통하며 자의 반 타의 반 반강제적으로 일어를 써야 했다. 원래 외국어 배우기를 즐겨하는 편이라 대학교나 사회복지센터 등에서 하는 무료 일어 강의를 참석하고, 자막이 있는 일본 영화나 드라마를 열심히 보면서 일어를 익혀나갔다. 직원들과도, 힘들지만 말 한마디 더 하며 일하기 위해서 애썼고, 성당이나 테니스장에서 만나는 일본 사람들과도 적극적으로 사귀었다. 외국인이니까 봐주겠지 하는 맘으로 아는 단어나 표현은 죄다 갖다 붙여서 수다를 떨며 대화를 시도하곤 했다.
그런데 외국어를 배워본 사람들은 대부분 느끼는 것이지만 말이 생각했던 것처럼 늘지 않는다. 국내에서 학원을 다니거나 독학하는 것도 아니고 일본 현지 기업에 와서 매일매일 일본 사람들과 만나고 일본 방송을 보고 일본 식당에 가고 쇼핑을 하며 일어를 쓰는데도 좀체 수준이 빨리 올라가지 않아 좌절할 때가 많았다.
어느 순간 변곡점이 찾아온다!
작년 하반기부터 일본 영업 담당자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 전에도 수출 계약 이행을 위한 재고 파악 및 선적 계획 회의 같은 데는 참석했었다. 그러나 내수 구매 영업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영업전략회의를 하는 것은 일어가 아직 서툰 내게 한 차원 높은 도전이었다.
전국 각 지역을 담당하는 영업맨들과 본부의 임원들이 참석한 상태에서 목표한 물량 매집을 위해 매우 실질적인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때로는 임원의 날카로운 질책이 있었고 담당 영업맨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꾸중을 듣는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때로는 회사의 잘못된 방침과 기대에 대한 따가운 지적이 현장을 누비는 영업맨의 입에서 거침없이 나오기도 했는데 그걸 대응하는 임원과 사장의 반응을 관찰하는 스릴과 재미도 쏠쏠했다고 할까. 아무튼 일어로 빠르게 이야기가 오갔고 알아듣지 못하는 단어나 표현들이 많았기 때문에 놓치는 정보나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제법 많았다.
작년 말부터였나 싶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회의에 참석하면 언어장벽으로 인해 멍하니 무슨 이야기를 하나 수동적인 모습이었던 때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 '회의가 재미있다!' 하고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파편적인 의미만 이해하던 수준에서 한 발짝 나아가 문맥을 파악할 수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대화의 흐름이 잡히자 드라마도 아닌 영업회의에서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런 느낌을 한 번 두 번 갖게 되자 그 뒤로는 가속도가 붙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더구나 수동적으로 듣는 상태를 벗어나 내 의견을 표현하고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말하기'까지 함께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 직원들은 내가 비교적 긴 이야기를 하게 되면, 고개를 갸우뚱한다든지 '저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많았다. 한참 말하는데 그런 반응들이 나오면 '아, 내가 지금 제대로 일본어 표현을 못한 거구나! 에이씨!'하고 속으로 좌절도 많이 했다. 그러나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외국어를 잘 배울 수 있는 장점들 중 하나가 '두꺼운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사람도 아닌 내가 온 지 2~3 년 만에 말을 잘 하면 얼마나 잘 하겠으며, 단어나 문법이 좀 틀린다 한들 외국인으로서 뭐 그리 창피할까 생각했다.
듣기가 되기 시작하고 말하기가 함께 이루어지는 걸 경험하자 없었던 자신감이 뭉클뭉클 솟는 것이, 마치 누군가 제삼자가 나에게 '와, 너 일본어 진짜 많이 늘었어!'라고 인정해 주는 느낌마저 들었다.
야마구치의 독특한 사나이
어제는 야마구치에 있는 스크랩 공급처를 영업 담당자와 함께 방문했다. 비교적 쌀쌀한 아침 공기를 느끼며 현장에 붙어있는 사무실 철문을 열었더니 문 바로 앞에 비치된 소파에 남자 둘이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전에 방문해 면식이 있는 우리 동료 영업맨이 먼저 " 오하요 고자이마스! (아침 인사로 안녕하세요?) " 하며 큰 소리로 씩씩하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 거래처 사람은 소파에 앉은 채 우리 얼굴을 빼꼼히 쳐다보며 " 초또 마떼. (잠깐 기다려줘) " 하며 한 마디를 던지고는 옆의 동료로 보이는 사람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는 거였다. 오전 10시 반 약속을 하고 우리는 10시 23분 정도 도착했는데 이 7분의 시간도 빠르다 생각하고 주차장에 차를 댄 채 7분을 기다린 후 정확히 약속했던 10시 반에 거래처 사무실 문을 열었던 우리다. 조금 당황한 우리는 문을 다시 닫고 추운 건물 밖에서 어정쩡하게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문이 열리고 다소 황당한 대우를 받으며 문이 다시 닫히기까지 그 찰나의 시간에 " 초또 마떼! "라고 반말 같은 표현을 쓰며 불친절한 대응을 했던 작자의 외모를 다소 충격적인 기분으로 관찰했다.
숱이 풍부하지 않은 머리는 양옆이 바싹 밀려 있었다. 윗머리는 파마를 한 건지 부분 고대기로 말아올린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아무튼 제멋대로 몇 가닥 휘이 웨이브를 그리며 자리잡고 있었다. 피부톤이나 피부 광택이 좀 어둡고 탁해 보였다. 흔히 이 업계에서 보이는 작업복이나 유니폼을 입지 않고 사복 차림이었는데 딱 봐도 날티가 나는 복장이었다. 몸에 붙는 청바지에 굽이 좀 높은 구두.
종합적으로 볼 때 나이는 40대 중후반이 아닐까 생각했다. 일본에 와서 여러 거래처들을 가봤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겪어 봤지만 야마구치의 이 남자는 순위 안에 들 독특한 외모와 말투를 지닌 사람으로 여겨졌다.
10여 분 지났을까. 밖에서 우리 동료 직원과 춥다 춥다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이 다시 열렸다. 그 직전에 나는 동료에게 " 아까 그 사람 혹시 야쿠자 아니에요? "라고 반 진담조로 말했었다.
자그마한 회의실로 안내되었는데 간이 테이블 위에는 셈베처럼 생긴 일본 과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가 4개 붙어 있었는데 그 가운데 3개는 등받이가 없는 원형 철제 의자였다. 그마저도 세트가 아니라 제각각의 디자인이었다. 공간이 좁아 동료와 나는 서로 바싹 붙어 앉았고,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까 그 특이한 남자 그리고 20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을 마주 보게 되었다.
오기 전에 동료로부터 대략의 정보를 들었다. 첫인상부터 강렬했던 그 남자가 수출 책임자라는 것을 알았고 옆의 여자는 입사한 지 1년 정도 된다는 부하 직원이었다. 명함을 교환하고 보니 그 남자가 회사의 取締役(とりしまりやく토리시마리야쿠), 즉 등기이사였다. 오너 사장은 따로 있었지만 그래도 회사의 중추인 임원 신분이었던 것이다.
미팅 시작!
"당신은 어디 출신인가요?"
그 거래처 이사가 다리를 꼬고 앉아 내 명함을 보다 내 얼굴을 보다 하면서 물었다.
"전 3년 반쯤 전에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 사람입니다."
내가 명랑한 톤으로 응답했다.
"오, 한국 사람이었구나. 잠깐만요. 카네코 씨, 커피 가지고 들어와 봐요!"
이사가 문 밖으로 직원 하나를 불렀다. 젊은 여자 직원 하나가 오봉(받침대)에 커피를 올려 회의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카네코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커피를 내려놓으며 상냥한 미소와 함께 여직원이 비교적 유창한 한국어로 인사를 하는 거였다. 그 젊은 여직원은 아마도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인 느낌의 앳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외부 손님이 한국 사람이란 걸 알고 호기심이 가득한 눈망울로 우리를 대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와,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온 이훈주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근데 한국말 너무 잘 하시네요~~"
기대치 않은 한국어 인사에 기쁜 마음도 들고 고맙기도 해서 내 목소리 톤이 들떴고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한결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막내급 여직원이 나가고 본격적으로 일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젠 진짜 일본어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야 했다. 같이 온 우리 동료는 그날 논의하고자 하는 아이템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모두 내가 설명하고 응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약간 긴장한 채로 온 목적을 설명하고 우리를 통해 이 일본 공급처의 스크랩을 구매하고자 하는 한국과 인도 바이어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바이어들이 궁금해하는 점들에 대해 미리 준비해 온 질문을 던졌다.
아침에 '문전박대'급 대접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그 날티 이사는 제법 자상하게 대화에 임하는 걸 알아챘다. 좀 더 자신이 생겼다. 예전에 일본 직원들과 동행해 일본 거래처를 만났을 때 제법 과묵했던 예전의 나와는 달리 엄청 수다스러워진 나의 모습이 스스로 느껴지고 있었다. 한 번 말문이 트이고 상대가 호의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자 대화가 술술 풀리는 거였다.
"이사님, 실은 저희가 이 알루미늄 스크랩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저희는 스테인리스와 철 스크랩 전문이거든요. 대신 저희는 야드를 여러 개 운영하고 해외 판매망이 잘 갖춰져 있습니다. 이사님은 알루미늄 전문가시니까 앞으로 좀 귀찮으시더라도 저희를 잘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최선을 다해서 배우고 따라가겠습니다."
"알겠어요. 난 이 아이템의 전문가입니다. 바이어와 가격협상을 하는 거며, 아이템 관련해서는 나를 믿고 가면 됩니다. 대신 우리는 신규 바이어와 직접 거래하고 싶지 않아요. 전에 중국 바이어랑 거래했다가 물대 송금이 지연되는 바람에 힘들었어요."
"아, 그건 걱정 마십시오. 최종 바이어가 아니라 저희가 물건 대금을 바로 지급할 겁니다."
"그래요. 그렇게 해주세요. 대신 인도나 러시아 등 신규 바이어를 개척할 때 내가 같이 가서 도와주겠소. 갈 때 당신 회사 유니폼 입고 같이 가서 직접 가격 협상하고 같은 회사 사람인 것처럼 할 수도 있어요. 난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거든. 하하."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의기투합하기로 했다. 실은 직접 이곳을 방문하기 전까지 도통 연락이 닿지 않아서 우리 담당 영업 직원이 애를 먹고 있었다. 나도 바이어한테 뭔가 질문에 대해 답을 해줘야 하는데 전화나 SNS로는 회신이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 보니 상당히 협조적이었고 양사가 함께 비즈니스를 잘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전화나 온라인 메신저로 회신을 잘 못 받은 이유는 그가 매우 바쁜 일정으로 움직여서 우리와 같은 신규 거래에 대해 신경을 쓰기 어려웠던 것이다.
물건이 적재되어 있는 야드도 구경시켜 주었고, 실제로 한국향 수출 컨테이너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선적항구까지 우리를 데리고 가서 작업 현장까지 견학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눈으로 직접 보고 현장에서 설명을 들으니 아이템에 대한 이해가 퍽이나 빠르고 정확했다. 사진도 수십 장 찍어서 실시간으로 바이어 회사에 보내며 피드백도 받았다.
알맹이가 꽉 찬 미팅을 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보통 식사 약속을 하지 않고 가면, 식사 시간이 되어 미팅이 끝나더라도 각자 그냥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 일본인 동료도 식사 시간이 된 걸 확인하고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거래처 사람들의 식사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허름한 소바집 풍경
그때였다. 날티 이사가 한 마디 던졌다.
" 점심은? 점심 같이 먹지? "
그가 반말투로 툭 던졌다. 회의 내내 존댓말과 반말을 수시로 섞어 쓰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야쿠자 같이 생긴 그가 우리를 친근하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이해가 가는 듯했다.
" 아? 점심요? 괜찮으시겠어요? "
동료와 내가 거의 동시에 그의 제안을 놀라워하며 외쳤다.
" 괜찮지요. 갑시다. 요 옆에 소바 잘 하는 집이 있어요. "
우리는 바다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한 허름한 식당에 들어갔다. 건물이 온통 나무판자 같은 재료로 되어 있었다. 안에 들어서자 역시 오래된 가게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깔끔하고 정갈한 분위기가 좋았다.
불투명 판유리로 된 창으로 정오의 햇살이 비쳐 들고 있었고 실내가 은은한 온기로 빛나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소바가 담긴 국물의 향기가 떠돌고 있었고 짧은 순간순간 나는 그 모든 걸 낯선 감정과 익숙한 감정이 섞인 채 시간을 음미하고 있었다.
왠지 이 날티 일본 거래처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꼭 일로 엮인 관계가 아니라 그냥 순수한 관계 말이다. 알고 보니 나이도 엇비슷했다. 첫인상이 나빠 미팅이 잘 될까 우려했던 마음은 완전한 기우였고 오히려 일적인 관계를 넘어 개인적인 관계로까지 기대하게 된 것이다.
이 날 나는 '이방인 적응 지수'를 두 단계 정도 더 올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