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국 출장길 성당에서 해외선교 단체의 소식지 하나를 집어왔다. 오늘 마침 성탄절이고 해서 조금의 돈을 후원하기로 했다. 소식지 표지에는 남수단의 소녀 하나와 소년 하나가 손합장을 한 채 활짝 웃으며 말구유 속의 아기 예수를 바라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아이 예수의 피부가 까맣다는 거다.
어릴 때는 서양인의 모습을 한 예수상과 성모상을 주로 보았었는데 이제는 한복을 입은 성모상이나 우락부락하고 털복숭이 예수 초상화도 보이고 소식지에서처럼 흑인 아기 예수상도 만날 수 있다. 그 당시 실제 모습이야 한 가지였겠지만 각 나라와 인종마다 더 친숙한 모습이 있을 테고 그에 맞춰 조각과 그림이 제각기 나름의 이미지와 형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인터넷뱅킹 계좌이체를 진행하면서 이런 생각을 잠시 했다. 성탄의 들뜬 기분과 즐거움으로 적은 금액이지만 가뿐히 송금 완료.
잠시 인터넷으로 기사를 검색해보니 구세군의 올해 모금 목표가 75억이란다. 새삼 그 큰 액수에 놀란다. 그러나 작년 기준으로 68억을 모금했다고 하니 75억도 가능한 수치일 것 같다. 4년 동안 매년 익명으로 1억씩 기부한 천사의 소식도 있었다. 연예인들 중에도 통큰 기부 천사들이 있다고 들었다.
이 선의의 기부와 후원 그리고 선행들. 부조리한 사회가 쓰러지지 않고 어떻게든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산소이자 물이며 영양분들이다.
그런데 나는 어릴 때부터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한 가지 주관적인 믿음이랄까 원리랄까 하는 게 생겼다. 기부와 선행에 모두 해당하는 것인데 여기서는 선의의 기부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아마 이 이야기를 접하는 많은 분들이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 불과하다고 전적인 동의를 해주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아까 내가 천주교의 한 해외선교단체에 적은 돈을 후원했다고 말했다.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자발적으로 그것도 아주 기분 좋게 돈을 보낸 후 약 20분이 지났을까. 회사에서 예정에 없던 보너스가 지급되었다. 내가 후원한 금액보다 더 많은 액수의 보너스가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마흔 조금 넘는 나이가 되기까지 살아오면서 이와 같은 경험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후원 대상은 가지각색이다. 국내나 해외의 불우이웃인 경우도 있고 종교 단체인 경우도 있고 도움이 필요한 지인이었던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쓰인 돈은 짧게는 몇십 분만에 길게는 몇 달 안에 두 배, 세 배, 열 배, 백 배가 되어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진기한 경험이었다.
필히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그런 기부나 후원을 한 것과 관계없이 내가 나중에 얻은 돈이나 재물은 그대로 내가 받았을 돈이나 재물이 아니었겠느냐고.
물론 나는 그 상관관계를 논리적으로 밝혀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이런 경험을 반복해서 해왔다면 – 물론 나는 대단한 기부 천사가 결코 아니다. 일상에서 내 기분 좋을 때 조금씩 한 정도였고 가끔 내 기준으로 호기롭게 쾌척하는 정도였다 – 뭔가 삶의 신비로운 가치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겠는가.
형제와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돈 관계에서도 이런 경험은 강화되었다. 내 이익을 지키려고 가족끼리의 거래에서 좀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경우엔 당장은 이익이 되거나 손해 안 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결코 나에게 이롭지 않았던 것 같다. 반대로 좀 여유를 가지고 약간 손해 보는 듯한 생각이 들어도 그냥 받아들이거나 적극적으로 돕는 위치에 섰을 때는 거의 매 경우마다 극적으로 나는 이로운 결과를 맛보았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