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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Dec 10. 2015

비행기 안에서 2 (논픽션)

윈난성 가는 길에

2010년 4월 어느 날


  비행기 좌석이 4A였다. 이륙 시간 45분쯤 전에 티켓팅을 했는데도 앞자리로 좋은 자리를 받았다. Nathan은 나보다  15분가량 먼저 표를 끊었는데도 훨씬 뒷자리였다. 이제 남방항공에서 VIP를 알아 모시는 걸까.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비행기 안에 오르니 이코노미 좌석 중 맨 앞줄이었다. 왼쪽 편 창가 좌석. 옆에는 파일럿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큼지막하고 각진 가방을 앞에 두고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1Q84를 꺼내 들었다.  지난번 한국에 다녀올 때 공항에서 골라온 책 중 하나이다. 어떤 내용인지 전혀 모르고 샀다. 하루키의 소설은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다. 하루키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체의 색깔이 뚜렷한 작가. 상실의 세계. 댄스 댄스 댄스 등등. 이번 작품은 또 어떨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샀는데.. 한 페이지 두 페이지 넘어갈수록 읽는 속도감이 붙었다. 묘사가 세밀했다. 그리고 문장은 짧았다. 마치 숙련된 기자들이 쓰는 문장처럼. 두 챕터를 읽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문장의 길이를 체크해보았다. 네 쪽 정도를 눈으로 쭈욱 훑어보았는데 몇 문장을 빼놓고 두 줄을 넘어가는 문장이 없었다. 많은 문장들이 한 줄 안에서 끝나고 있었다. 문장이 짧으니 이해가 빨랐고 쉽게 쉽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 나도 그런 문체를 따라 하고 있다.     


  이륙하기 전부터 읽기 시작해 대략 30분 정도 읽었을까. 잠이 들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눈을 떠보니 비행기는 이륙해 있었고 승무원들이 음료를 서비스하고 있었다. 나는 橙汁(청쯔;오렌지 주스)를 주문해서 한 잔 완전히 들이켰다. 잠시 후 식사가 제공됐다. “    


  “牛肉面还是海鲜面(니우로우미엔하이스하이시엔미엔)? 先生您要什么呢(셴셩닌야오션머너;선생님 무얼로 하시겠어요?)”    


  牛肉面(니우로우미엔;소고기가 들어간 면요리)과 海鲜面(하이시엔미엔;해물이 들어간 면요리)의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아침을 든든히 먹고 와서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자 남자 승무원이 주식을 빼고 후식이 든 종이상자를  건네주었다. 아마도 후식이라도 먹으라는 배려인가 보다. 안에서 자그마한 팥떡이 든 봉지를 뜯고 한 입에 넣었다.     


  비행기가  광시 성 위를 날고 있었을까. 앞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바로 앞의 칸막이 무늬를 무심결에 보고 있었다. 작은 점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프린트되어 있었다.  그때 갑자기 기체가 쿵 떨어졌다. 또 제트기류를 만난 건가.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순간 당황했지만 자세를 바로 하면서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비행기를 타면서 제트기류를 만난 적은 많이 있다. 속이 불편했지만 이젠 요령이 생겼다. 일단 시선은 먼 곳을 보아야 한다. 택시 안에서도 무릎 위의 책을 보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어지럽다. 그럴 때는 얼른 전방으로 시선을 돌려야 한다. 비행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오늘은 바로 앞이 트여 있지 않고 점들이 박혀 있는 하얀색 칸막이로 막혀 있다.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그것은 바로 청룡 열차를 탔다거나 물 위에서 빨리 달리는 수상제트보트를 탔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흔들림을 놀이의 한 부분으로 전환할 수 있다.    


  바로 상상에 들어갔다. 자, 나는 보트를 탄 거야. 물 위에서 배가 심하게 흔들리지만 난 시원하게 물줄기를 가르며 즐기고 있는 거야. 아니 아니, 난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는 거야. 이제 곧 공중에서 한 바퀴 돌 테니 준비해! 지금 흔들리는 건  아무것도 아니라구.    


 상상의 강도를 높였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하게 말을 듣지 않는다. 전에 비행기를 탈 때 이런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려도 괜찮았는데. 오늘은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이었다. 아니, 흔들리는 게 그대로 느껴졌다. 갑자기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슴이 덜컥했다. 나만의 멀미 방지법이 먹히질 않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비행기의 흔들림은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계속 이어진다. 아, 정말 이래선 안되는데.     


  순간 오만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911 테러. 비행기가 추락하기 전 마지막으로 가족들, 사랑하는 사람들과 통화하는 사람들의 모습. 천안함의 침몰. 차디찬 바다에서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익사해간 젊디 젊은 군인들. 몸이 너무 괴로웠다. 몸을 바로 했다. 아직은 아니었지만 이러다가 토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을 바로 하니 안전벨트가 조여 왔다. 아침을 많이 먹어서인지 벨트가 조여 오니 속이 더 안 좋았다. 에이, 팥떡을 먹지 말았어야 하는데. 방부제가 많이 들어간 건지. 속이 안 좋다.     


  하느님, 너무 괴롭습니다. 이런 기도 하기는 싫지만 좀 도와주세요. 제가 많이 착하게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려구요. 기복신앙을 그리 좋게 여기진 않지만 힘들 때마다 하느님을 찾는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도 물론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고통스러울 때는 필사적이 된다. 특히 못 마시는 술을 오버캐퍼가 되도록 마시고 난 다음 토할 것 같고 속이 뒤집어져 미칠 것 같은 때 필사적으로 하느님을 찾는다.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 잘 살겠습니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선량하게 살게요.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 주님!!    


  인간은 나약하다. 누가 칼로 찌르거나 총에 맞은 경우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나약할 수가 없다. 그냥 비행기가 흔들리는  것뿐인데 이렇게 괴롭고 고통스러우니. 갑자기 타니타닉호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여자 친구는 배의 파편 위에 올려놓고 디카프리오는 차가운  얼음물 속에서 여자 친구 옆을 지키고 있다. 얼마나 추울까. 얼음물 속에 몸을 담그고 구조의 손길을 마냥 기다려야 하는 심정이란 어떤 걸까. 그게 나이고 내 아내였다면.. 아, 상상만 해도 끔찍하고 끔찍하다.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오히려 더 멀미가 날 뿐이었다. 고개를 창가에 기댔다가 의자를 뒤로 제쳤다가 몸을 세웠다가. 어떤 자세를 만들어도 큰 차이는 없었다. 급기야 속을 좀 편하게 하기 위해 안전벨트를 풀었다. 바지 허리띠도 풀었다. 단추도 끌렀다.     

그 순간이었다.     


  “飞机已经下降了(페이지이징샤장러; 비행기가 이미 하강하기 시작했습니다) ”    


  남방항공 여승무원의 목소리가 기내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아, 살았다. 이제 살았다.   


  속의 불편함은 아직 가시지 않았지만 공포심은 금세 사라졌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기체의 흔들림과 비행기의 추락에 대한 공포는 중국인 여승무원의 안내 멘트가  나오자마자 깨끗이 자취를 감추었다.     


 쿠궁.   

비행기가 공항에  내려앉는다.  윈난성 쿤밍 공항의 풍경이 평화롭게 다가온다. 햇살이 눈부시게 밝다. 나는 행 복하다. 삶은 유쾌하고 즐거운 거다.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언제 죽음의 공포를 느꼈는지 짐작도 못할 여유로운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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