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과 93년 대입 학력고사
겨울에 난방이 된 따뜻한 공간에 들어서면 과거의 겨울이 아스라이 떠오르곤 한다. 참 여러 가지 추억들이 내 마음속 어딘가에 잠을 자다가 이런 조건이 채워지면 깨어나는 것이다.
1992년 겨울. 마지막 학력고사가 치러졌던 날
한 대학교 강당에 땅땅하고 울려 퍼지는 라디에이터의 난방 때리는 소리. 낡은 나무판과 철제로 만들어진 강당 강의실 의자에 앉은 100여 명 남짓 되는 수험생들은 사뭇 긴장한 표정들이 역력한 채로 시험지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문제를 풀고 있다.
마지막 학력고사였다. 나는 91년 겨울에 이어 두 번째 학력고사를 치르고 있었다. 재수를 위해 영등포에 있는 입시 종합반 학원을 다니며 1년 간 공들인 결과가 이 한 번의 시험으로 결판이 나는 것이었다. 게다가 한 번의 실패를 맛본 후라 그 비장함은 당시의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었다.
아버지는 대학교 캠퍼스 어딘가에 차를 주차시키고 아들의 시험 시간을 함께 지켜 주시고 계셨다. 이미 몸은 다 커버린 성인이었지만 대학입시라는 무게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던 스무 살의 나에게 아버지의 그런 동참은 참으로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1991년 겨울. 첫 대입 학력고사
바로 1년 전에 나는 다른 대학교 강의실에서 이미 한 번의 입시를 경험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생각나는 것은 강의실에서 만났던 한 여학생의 모습이다. 같은 교실에서 시험을 봤으니 만일 둘 다 합격했다면 92학번 같은 과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하얗고 맑은 얼굴빛을 하고 있던 그녀. 당시의 나는 그 시험을 무사히 잘 치르고 빛나는 대학생이 되어 시험장에서 만났던 그 설렘의 대상과 친구가 되는 미래의 상상을 잠시 했었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나는 내 불합격 소식을 확인하고 그녀의 합격 불합격 소식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자리로부터 몇 칸 떨어져 있던 그녀의 수험번호를 계산하여 확인해본 것이다.
합격
두 가지 상반된 소식을 확인한 스무 살의 나는 아주 짧은 시간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신속히 스스로를 회복시켰다. 이제 나와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나는 이제 1년 간 새로운 전투에 돌입해야 한다고.
이십여 년이 흘렀다. 노어노문학과를 나온 그녀는 지금쯤 어디서 무얼 하며 지내고 있을까. 이제는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기억도 나지 않고 이미지만 어렴풋이 기억나는 사람. 따뜻한 방에서 라디에이터가 아닌 에어컨 온풍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잠시 추억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