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막. 찬 바람이 불며

불확실한 미래

by 안드레아

영민의 불안한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가고 있다. 이대로 계속 밀어붙여야 하는지. 방송국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벌써 네 번째 낙방. KBS, MBC, 경인방송, 춘천 MBC 모두 떨어져 버렸다.


지금 아나운서 준비를 같이 하고 있는 친구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붙는다는 확신만 있다면 1년이라도 더 준비할 수 있겠지만, 이 바닥에서 합격에 대한 확신은 어렵다. 기껏해야 남자 1~2명 여자 2~4명 뽑는 데 수 백 명이 그것도 대부분 스펙 좋은 지원자들 몰리니 어떻게 붙을 거라 확신할 수 있으랴.


매주 목요일 불교 방송국의 강당에 나가 뉴스 낭독을 하고 발음 교정을 받는 등 아나운서 실기를 준비하고는 있지만 영민의 가슴은 그 어느 때보다 답답하고 불안하기만 하다.


“ 선생님, 안녕하세요? “


“ 어, 영민 군 왔어요? “ 전직 동양 방송의 아나운서를 지내고 현재 후학들을 지도하고 계신 공성경 선생님이 영민을 반갑게 맞이했다.


“ 선생님, 안녕하세요? 영민 오빠 안녕?”

진세영이 뒤따라 들어오며 인사를 건넸다.


세영의 뒤를 이어 어떤 여자가 들어왔다.


“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하고 죄송합니다.”


“ 어, 휘진이 잘 지냈니? 정말 오랜만에 보는구나. 어서 들어와.”


안휘진. 서울대 신문학과 졸업. 동대학원 재학 중.


크.. 정말 이쁘군. 키도 크고 얼굴도 하얗고. 영민은 휘진을 보자 주눅이 들어버렸다. 이곳 불교 방송국의 방송 아카데미에 벌써 한 달 이상 다녔지만 휘진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알고 보니 아카데미를 다닌 지는 벌써 반 년이 다 되어가지만 대학원에 들어가면서 최근 한 달 대학원 일로 아카데미를 못 나왔다고 한다.


현재 이곳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있는 학생들은 대략 여자가 10여 명, 남자가 영민까지 포함해 5명 정도 되었다. 그 가운데 대학생들이 많았지만 이미 졸업한 친구들도 있었고, 증권사 직원, 기업체 소속 방송국 PD, 일반 기업체 사원, 전직 기자, 대학원생 등이 있었다. 현재 상황은 제각각이지만 모두들 방송일을 하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 젊은이들이었다.


“이제 MBC 공채가 얼마 남지 않았어요. 모두들 바싹 신경 써서 마무리 잘 합시다.

오늘은 뉴스 스크립트를 나눠줄 테니 각자 실제 방송에 임한다고 생각하고

제대로 낭독 한 번 해봅시다.”


진세영이 처음 순서를 맡았다.


“ 어제 오전 새벽 4시 30분경 강남구 논현동 육경 빌딩에서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상가 점원과 경비원 등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을 입어 인근 병원에 후송돼 입원 치료 중에 있습니다. …”


세영은 지난번 서울방송 공채 때 최종 면접까지 올랐다고 아깝게 떨어졌다고 한다. 5명을 최종 선발하는 공채 시험에서 최종 후보는 10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아까왔을까. 세영은 키가 173센티미터에 달했고 눈이 크고 날씬한 서구형 미인 축이었다. 그러나 영민이 보기에 어나운싱이 그리 훌륭하진 못했다. 일단 목소리가 좀 허스키한 게 뉴스톤은 아니었다. 아마도 방송국에 들어간다 해도 오락프로가 더 어울릴 듯한 목소리톤과 분위기를 가졌다.


다음은 영민의 순서였다. 영민은 짧게나마 기자 생활을 했고 방송 경험도 있었다. 주변에서 아나운싱을 잘 하는 동기와 선배들을 봐왔고 자기 스스로도 목소리에는 자신이 있었다. 영민은 저음이지만 깔끔하고 윤기 있는 음성으로 사건 사고 뉴스를 읽어내려갔다.


몇 사람의 낭독이 더 이어지고 안휘진의 차례가 돌아왔다.


영민은 휘진의 뉴스 낭독을 유심히 들어보았다. 마스크는 저 정도면 수준급이다. 당장 여기 모여 있는 아나운서 지망생 가운데에서도 단연 돋보이는군.


'앗, 근데 보이스가.. 아.. 보이스가 마스크를 따라오지 못하는군. '


휘진의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다. 차분했으며 기본적으로 허스키한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발음이 정확하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음가(音價) 하나하나를 정확히 내주지 못하고 사람들이 일상 대화에서 말하 듯 충분한 음가를 다 내주지 않고 약간 흐르는 듯 발음하는 편이었다. 특히 모음 발음이 완벽하지 못했으며 자음에서는 히읗 발음이 불완전하거나 무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영민은 휘진이 낭독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딴생각을 했다. 저렇게 지적이면서도 깔끔하고 발랄하게 생긴 여자 친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남자 친구가 분명히 있겠지? 아쉽다. 내가 지금 번듯한 직장을 다니고 있는 안정적인 상황이라면 한 번 대시하여보겠는데.. 이거 내 코가 석자니 뭐.. 아, 근데 저 여자 옷도 참 잘 입었다. 난 저렇게 Formal한 복장도 참 보기 좋아. 후훗.


"휘진아, 이제 시험 얼마 남지 않았잖아. 많이 나아지긴 했는데 아직도 발음이 약간 불명확한 느낌이야. 단어 하나하나를 짚어주듯 발음할 것 까진 없지만 휘진이 너는 너무 쉽게 발음하고 있는 거야. "


"네, 선생님. 제가 자꾸 그러네요. 흠. 저도 신경은 쓰는데… 참… 다시 한 번 해볼게요."


휘진은 맑은 미소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선생님의 지적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며 여유롭게 다시 스크립트를 읽어 내려갔다. 지금 모여서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 대부분이 약간은 축 처진 느낌인데 반해 그녀는 왠지 그런 시험과는 별 상관없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모두들 겉으로는 차분하고 세련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이들에게서 쉽게 감지되었는데 유독 그녀만은 예외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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