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더를 해야 하는데...
벌써 9월이 되었다. 아직도 광저우의 날씨는 30도를 훨씬 웃돌지만 그래도 가장 더운 여름날은 지나간 것이다. 제이가 대우인터내셔널에 입사한 지도 5개월이 지났다. 하지만 그녀는 5개월 동안 영업 직원으로서 제대로 된 오더를 해본 적이 없다. 자존심이 좀 상했다. 1부문의 동기는 비록 작은 계약이지만 입사 후 두 달 만에 첫 계약을 성사시키고 지금까지 매 달 한두 건 이상의 계약을 만들어내고 있다.
제이: 촬리, 넌 입사하고 언제 첫 오더를 했어?
촬리: 어…. 창피한데.. 그 얘기하면…
제이: 괜찮아. 얘기해봐. 난 뭐 5개월 동안 한 톨도 못했는데 뭐 (웃음)
촬리: 그게 말야. 난.. 저.. …… 해가 바뀌고 나서야..
제이: 뭐!! 하하~~ 너 언제 입사했는데?
촬리: 2010년. 2010년 여름에..
제이: 몇 월에?
촬리: 6월에..
제이: 그러면 2011년에 처음으로 계약을 따낸 거야?
촬리: 응. 근데 솔직히 내가 하는 분야가 쉽지는 않아. 대부분 이미 장기 계약이 되어 있어서 틈이 없었다구.
게다가 비철 분야가 철강 쪽보다는 LME 등 어느 정도 지식을 더 요하거든.
촬리는 중산대학교를 졸업했다. 중산은 손중산 선생. 다시 말해 쑨원 선생을 말한다. 광동 지역에서는 쑨원의 이름을 딴 중산대와 화남이공대를 최고로 쳐준다. 대우인터 광주무역법인에도 중산대를 졸업한 직원이 세 명, 화남이공대를 나온 직원이 또 세 명 있었다. 촬리는 국제무역과 영문학을 복수 전공했다. 제이보다 세 살이 많은 이 친구는 입사도 꼭 3년 빠르다. 그의 외모는 판다를 연상시키는데 0.1톤에 가까운 곡선형의 몸매에 안경 속의 쌍꺼풀 진 커다란 눈이 큰 특징이다. 가끔 그가 안경을 벗으면 놀라우리 만치 커다란 눈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한국의 순정만화에 나오는 여자 캐릭터처럼 커다란 눈이다. 가끔 제이는 촬리가 다이어트를 하면 어떨까 상상하곤 한다. 잘 하면 꽤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도 같다. 후훗. 그리고 촬리는 대우 안에서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마음씨 좋은 동료이기도 하다.
지난번 샤먼 출장에서도 제이는 결국 철광석 계약을 성사시키는 데 실패했다. 데코는 광시성에 확실한 End-User를 가지고 있는데 이 바이어 한 곳에만 연간 약 300만 톤의 철광석을 판매하여 짭짤한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광시성의 수요가는 건설용으로 쓰이는 철근과 선재를 생산하고 있었는데 중국 정부에서 중소 규모의 공장에는 철광석 수입 허가를 내주지 않아 데코와 같이 철광석 수입 License를 가진 대리상을 통해 수입을 하고 있었다. 주로 러시아/우크라이나산 Iron Ore Concentrates와 인도산 Iron Ore Fines를 많이 수입하곤 했다.
대우인터 본사는 Spot cargo로 최근 인도산 철광석 중에서 Fines와 Lumps를 많이 소싱하고 있는데 항상 다른 공급선에 비해 가격이 높다는 컴플레인을 많이 들었다. 아무래도 우리 광산에서 나온 카고도 아니고 우리가 값싸게 미리 선구매하여 공급하는 것도 아니라 이미 투명해진 중국 철광석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대니스 역시 이 점이 못내 아쉬웠다. 대니스는 한국에서 파견나온 매니저이다. 제이가 대우인터에 레주메를 제출한 후 대우인터에서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온 사람이다. 대니스는 본사에서 철광석을 주관하던 팀에서 근무했었다고 한다. 철광석과 빌렛(STEEL BILLET- 철근을 생산하기 전 단계의 정방형의 길쭉한 반제품)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프로였다. 그러나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에서 노벌 홍콩, 스웨디쉬 아이언, 시노 아이언 등 대형 철광석 트레이더들과의 경쟁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당사자였다.
노벌 홍콩이라는 곳은 대니스가 본사에서 일하던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돈 많은 회사였다. 홍콩계 자본으로서 이들은 프로 중의 프로이다. 지금도 대니스가 기억하는 것은, 노벌이 흑해에서 빌렛을 가득 실은 배를 띄워 중국이나 동아시아로 카고를 운송하면서 가격이 맞으면 카고가 바다 위에 떠가는 채로 계약을 체결하곤 했다는 것이다.
보통의 트레이더들은 공급선과 계약을 체결하고 나서 바이어의 신용장을 받거나 선수금을 일부라도 받은 후에야 선적을 시킨다. 그런데 이놈의 노벌 홍콩이라는 회사는 그런 기본 거래 스킴이 우스워지는 곳이었다. 이 회사는 백투백거래(Back to back 거래: 공급계약과 판매계약을 동시에 체결하는 방식, 거래 Risk가 적음)로는 돈이 안 된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으며, 오래전부터 스페큘레이션(Speculation투기거래)을 해왔다.
다시 말해 시황을 면밀히 분석하여 구매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면 과감하게 판매처 확정이 되기 전이라도 물건을 먼저 사들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이어가 확정되기 전에는 물건을 선적하지 않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 회사는 왜 손해를 보면서 혹은 왜 헐값에 물건을 처분해야 하느냐고 비웃는 듯, 적정 가격 타깃이 되지 않으면 물건을 먼저 배에 실어 띄워 보내는 것이었다. 보통 흑해에서 동아시아까지 4~5만 톤급의 카고를 실어 보내면 약 30~40일 정도 걸린다. 이 기간을 십분 활용하여 가격이 올라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만일 가격이 기대한 만큼 오르지 않으면? 그때는 손해를 보고 팔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카고를 일정 하역항에 내려놓고 다시 가격이 오를 때까지 기다리든지. 정말 돈이 얼마나 많은 곳인지. 아니면 얼마나 돈을 값싸게 잘 빌리는 녀석들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