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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Nov 01. 2017

아소산 남쪽 우연한 가을

우동소바 식당 마당에  감나무 한 그루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 있던 먹구름 적군을, 용기 충천한 햇살 대군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외치며 몰아내고 있었다.


 미야자키현의 타카치호 협곡에 다녀오던 도중이었다. 3시 가까이 되도록 점심을 먹지 못해 우동/소바 팻말을 보고 차를 세웠다.


 다다미방과 테이블석이 있었는데 양반다리 하고 앉는 것이 불편해 바로 테이블 자리로 갔다. 메뉴판을 보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우동 세트 메뉴를 하나 시켰다. 그랬더니 튀긴 물고기와 간장에 절인 물고기 두 마리가 반찬으로 나왔다. 둘 다 민물고기로 보였는데 나무젓가락으로 해체시켜 먹으려 하니 살이 거의 없어서 당황했다.


 지방 라디오 방송이 나오고 있던 식당의 다다미방에는 밥을 다 먹은 젊은 일본 청년 둘이 벌러덩 식탁 옆에 누워 쉬고 있었다. 식당에서는 그냥 일반 손님들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식당과 관련된 사람들이 아닌가 싶다. 운전하면서 조금 피곤하고 졸린 상태여서인지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두 다리를 쭈욱 뻗 누운 그들이 내심 부러웠다.


 우동과 흰쌀밥은 비우고 물고기 두 마리는 마구 헤집어 몇 점 입에 넣지도 못하고 식사를 마쳤다. 총 230km를 가야 하기 때문에 다시 운전대를 잡고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고 어둑했던 날씨가 어느 평야 지대에 다다르자 햇살을 머금었다. 그런데 차를 세우고 보니 형세가 달라졌다. 그저 햇살을 머금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 있던 먹구름 적군을, 용기 충천한 햇살 대군이 우레와 같은 함성을 외치며 몰아내고 있었다.



자연이라는 위대한 화가가 그린 마스터피스


 차를 세운 도로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서자 벼농사를 짓는 곳으로 보이는 드넓은 논이 나타났다. 벼이삭을 베어낸 자리와 그렇지 않은 자리가 황금색과 연두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화산지대로 이루어진 산등성이 위로 먹구름이 수묵화처럼 퍼져 있고, 반대편에서는 찬란한 햇살이 지면에 부딪히며 강렬하고 밝은 색감을 연출했다. 넋을 잃고 한동안 멍하니 그 풍경 속에 서 있었다.


 불과 얼마 전에 강원도 원주를 다녀오면서 우리나라의 가을 논 풍경을 목도했는데 왠지 이 아소산 남쪽에서 발견한 것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뭐라고 딱 집어 말하기 어렵지만 똑같은 가을이며 똑같은 수확기 논 풍경이라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연은 종종 놀라운 그림을 그려 인간을 매료시킨다. 이날 우연히 만났던 풍경 역시 위대한 자연이 창조한 걸작의 회화 작품이었다.


 좀 더 거장의 작품을 감상하고 싶었으나 갈 길이 멀어 다시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월의 구마모토는 참새 방앗간과도 같이 금세 내 발을 다시 붙잡았다. 얼마 가지도 못했는데 '사계의 숲 온천'이라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곧장 그쪽 방향으로 차를 돌려세웠다.


 입욕료는 단돈 300엔 (약 3천원 수준). 하지만 수건을 제공하지 않는 곳이라 150엔을 주고 얄팍한 타월을 하나 사서 들어갔다. 일본의 어떤 시골 마을에 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사계의 숲 온천 역시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많이 계셨다. 커다란 대욕조 안에서 들어서려 하자 낯선 중년 남자의 방문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눈빛들이 느껴졌다.


'대한의 사내가 들어가신다. 음화화하하!'


 티를 많이 내진 않았지만 당당히 욕조 안으로 발을 내디뎠고 머리에 수건을 올려놓은 할아버지와 조금 더 젊어 보이는 할아버지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타카치호 협곡을 비바람 맞으며 몇 시간 누비고 다녀 피로해진 몸이 사르르 녹아 버리는 순간이었다.


온천 휴게실 창밖으로 보이는 어느 시골 마을 풍경


 온천에는 무료 휴게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역시 다다미방으로 된 공간이었는데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서니 웬걸 아무도 없었다. 따뜻한 온천물로 피로를 풀자 잠이 소르르 오기 시작했다. 가지고 온 가방을 테이블 한쪽에 기대어 놓고 바닥에 덜렁 누웠다. 꿀맛과도 같은 단잠을 잤다. 다섯 시가 되어 온천 종업원 한 분이 들어와 " 실례합니다! 청소 좀 할게요! "라고 외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법 가뿐해짐 몸을 일으켜 다시 차를 달렸다. 이미 해가 기울어 사위는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하루 가운데 이 시간대의 세상은 참으로 몽환적이다. 낮과 밤이 교차하는 그 길지 않은 시간의 하늘과 노을과 거리는 마치 내 머릿속에 그려지는 환영처럼 느껴지곤 한다. 피로가 어느 정도 풀렸기 때문에 이 특별한 시간의 꿈결 같은 세상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아소산 남쪽에서 만난 우연한 가을을 뒤로한 채 차는 북쪽으로 북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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