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dy Bay
[시드니 제 5일차]
스트라스필드에서 서큘러 퀘이로 메트로를 이용한 후 서큘러퀘이에서 페리로 왓슨스 베이까지 도착.
선상에서 갈색 머리를 휘날리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젊은 여성이 자꾸 시야에 들어왔다. 사방의 풍경들에 만족했는지 연신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아차, 내가 지금 다른 여자에 빠질 때가 아니다. 나도 이 멋진 풍경을 놓치지 말아야지. 속으로 잠시 마인드 컨트롤.
선착장에서 내린 후 지도를 보며 왼쪽부터 시작할지 오른쪽으로 돌지 생각하다가 백사장이 보이는 왼쪽 루트로 들어섰다.
섬마을은 어떤 나라나 매우 매력적인데 그 풍경은 천차만별이다. 바다의 풍경이야 말할 나위 없이 아름답지만 섬마을의 집과 거리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가옥의 구조와 색감, 정원을 꾸민 나무와 꽃들이 각 나라마다 각 지역마다 달라서 눈요기에 제격이다.
잠시 걸으니 공원 입구에 스쿠버 다이빙 복장을 한 무리들이 보인다. 근처에 다이빙을 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있나 보다.
[시드니와 필리핀 스쿠버 다이빙의 차이]
시드니에 사는 동생은 아마추어 스쿠버 다이빙 강사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두 나라에서 즐기는 스쿠버 다이빙에 차이가 있단다.
신비로운 바닷속 풍경을 즐길 수 있는 데에는 차이가 없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동생은 동남아에서의 다이빙이 더 좋았다고 한다. 시드니의 바다는 물살이 세다. 스쿠버 다이빙을 마치고 물가로 나올 때 쯤,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몸은 많이 지쳐 있고 힘도 빠져 있다. 그럴 때가 위험하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다이빙을 마치고 뭍으러 나오려고 하는 순간 백파도가 쳐 제대로 물가에 닿지 못하고 물살에 휩쓸렸다. 백파도 그러니까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는 시야를 가리면서 순간 정신을 못차리게 만들고 사람에 따라서는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한단다. 그러다가 파도에 휩쓸려 바위 사이에 낀 채 옴짤달싹 못하고 끊임없이 철썩대는 파도를 정면으로 맞으며 공포 속에 과호흡 증세를 보인다. 그러다가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동남아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즐기는 바다는 상대적으로 거칠지 않다고 한다. 뭍으로 나올 때는 옆에서 사람이 끌어 주고 장비까지 벗겨 주어 매우 편하게 나올 수 있다고 한다. 힘이 빠져 있을 때라서 이렇게 주위의 도움을 받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는 거다.
남반구 바닷가에서 비에 흠뻑 젖다.
사진 몇 장을 시드니 동생에게 보냈다. 잠시 후 그가 방향을 다시 잡아 주었다. 꼭 보아야 하는 사이트들이 있다는 것이다. 왓슨스 베이의 왼 편에 위치한 레이디 베이와 오른 편에 위치한 갭파크 등 포인트를 짚어 주었다.
길을 가다 보니 레이디 베이 싸인 보드가 보였다. 바위 절벽으로 이어지는 해변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바다는 블루와 에메랄드 사이를 오가며 윤슬로 빛나고 있었고 하늘 역시 블루 스카이와 짙게 드리운 구름이 어우러져 입체적인 풍경으로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
어디가 어디인지 방향을 정확히 잡고 가기 보다는 발길 닿는 대로 길이 나 있는 곳으로 걸었다. 중간에 아담한 암벽으로 둘러쌓인 아담한 백사장이 나왔는데 이곳의 사진을 찍어 나중에 시드니 동생에게 보내 주었더니 그곳이 누드 비치라고 했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사전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그곳에서 누드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을 맞닥뜨렸다면 조금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점점 뜨거워지는 햇살에 더위를 느끼며 해안가를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서자 오래된 등대가 나타났다. 등대 안쪽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으로 보였다. 문 앞쪽에 등대에 얽혀 있는 사연이 적혀 있었는데 그 순간 기욤 뮈소의 소설에 등장하는 타임트랩의 공간이었던 낡은 등대를 떠 올렸다.
한 젊은 서양 남자가 엎드려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더 살펴 보니 그는 드론을 띄우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는 푸른 하늘과 파란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드론을 띄운다. 매우 고급스런 무대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다만 드론이 드센 바닷바람에 날려 바다에 빠지지나 않을까 생각했다.
날씨 예보에서 비가 오지 않을 것으로 들었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에 구름이 많이 걸려 있었지만 막상 비가 내리자 하늘은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뒤덮였다.
어제까지 가방에 열심히 우산을 챙겨 다녔지만 오늘은 아무 것도 없었다. 금세 비가 거세게 내려 해변의 나무 밑으로 몸을 숨겼다. 나무 아래로 걸어가는 사이에 짧은 머리를 단정하게 깎은 금발의 건장한 사내 둘을 만났다. 둘다 썬글라스를 끼고 있었고 생김새가 매우 흡사했다. 두 남자 모두 반바지에 반팔 티를 입고 있었는데 티가 채도가 낮은 핑크빛이었다. 같은 디자인이 아니었으나 두 분홍빛 티는 세련되게 맞춘 커플티처럼 잘 어울렸다. 한 남자가 나와 잠시 눈이 맞았으나 나는 비를 피해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지나쳐 갔다.
나뭇잎이 무성해 보였으나 빗발이 굵어지고 많은 양의 비가 내리자 나무 아래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저 젖어들어가는 몸을 느끼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흘끗 왼쪽 편을 쳐다 보았는데 예상치 못한 광경이 펼쳐졌다.
아까 지나친 두 건장하고 깔끔한 남자들. 마치 친형제거나 어쩌면 쌍둥이처럼도 보이는 두 사내가 포옹을 한 채 입을 맞추고 있었다.
영화에서만 접한 적 있는 광경에 살짝 아찔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밀회 장면을 빤히 쳐다볼 수는 없었다. 바로 눈을 돌려 아직도 후두둑 비가 내리치는 바다를 향했다.
뭔지 모르겠지만 매우 이국적인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비처럼 스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