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재 수출입 업계에서 교육 서비스 분야로
이번 14편에서는 일본에서 2013년부터 2017년 말까지 철과 비철 스크랩 등 원자재 수출 기업에서 일했던 제가 우여곡절 끝에 서울에 본사를 둔 글로벌 교육 서비스 기업에 들어온 후의 소회와 일상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아직 짧은 시간의 경험이라 깊이 있는 비교와 성찰은 못됩니다. 이전과 완전히 성격이 다른 새 직장에서의 일상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과 "I See You!"
[2018년 2월]
새 직장에서 자주 교육을 받고 있다. 들어온 지 두 달이 채 안 된 지금 회사에서 읽으라고 독려하는 책이 벌써 열네댓 권이 넘어간다. 책 읽기를 즐겨하는 편이긴 하지만 꼭 읽어야 한다는 책들이 제법 많아서 조금 부담이 된다. 그러나 일본의 조용하고 작은 회사에서 세상의 변화와는 거리를 두고 지내던 때에 비해 지금 나는 무언가 생동감이 넘치고 세상과 'I see you'하는 느낌으로 하루하루 지내고 있다.
* ' I see you'의 의미: 영화 아바타에서 나비족들이 쓰는 표현으로서 누군가의 앞에 경이로운 마음으로 다가서며 하는 말. 나는 너를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너의 내면을 본다는 의미.
회사의 주력 교육 서비스 제품에 대한 담당팀의 교육이 있었다. 나도 이제 나이를 좀 먹긴 했는지 강의를 맡은 분들이 여성 세 분에 남성 한 분으로 모조리 나보다 손아래였다. 다행히 그들과 나는 상하 관계가 아니고 수평적인 관계에 가깝다. 대부분 삼십 대 중반의 연배였으니 사십 대 중반인 나와 나이 차이가 조금 나는 편이다.
그들은 매우 세련되고 프로페셔널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며 경력으로 입사한 우리들을 이끌어 주었다. 물론 이 회사에 갓 입사해 교육 서비스와 프랜차이즈 사업에 대해 무지해 모든 것이 새로웠던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정황을 감안한다 해도 그들이 준비한 자료의 구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진행된 프레젠테이션으로 미루어 볼 때 신선한 충격으로 느껴질 만큼 강의와 진행이 훌륭했음을 고백한다.
직급을 떼고 영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면?
[2018년 5월]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속한 해외사업 조직은 작은 시도를 시작했다. 그것은 같은 층에서 일하고 있는 사십여 명의 조직원들이 이제부터 서로를 영어 닉네임으로 부르기로 한 것이다.
" Andy 고마워요. 오늘 오후 2시에 해외법인들과 화상회의가 있는데 같이 들어가서 인사 좀 해 주세요. "
" 오, 그거 정말 좋은 기회군요. Fanny, Jane 고맙습니다. 기꺼이 참석할게요. ^^ "
" Julia, 회사에 독서 모임이 있다고 하던데 어떻게 가입할 수 있나요? "
" 아, 그게 모임의 총원에 제한이 있어서 새로 결원이 나면 가입 신청을 할 수 있어요. 제가 나중에 결원이 생기면 Hans한테 알려 드릴게요. ^^ "
한글 이름 대신 서로 영어 닉네임으로 부른다. 대리, 과장과 같은 직급은 붙이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서로 존대한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규칙이 되었다. 모 기업에서 오래전부터 직원들끼리 서로 직급을 붙이지 않고 누구누구'님'이라 부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나 우리나라 회사에서 이렇게 직급의 고하를 떠나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처음엔 모두 조금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회사의 규칙으로 공표가 되었기 때문에 일단 따르고 실행에 옮겼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어색했던 느낌은 점점 엷어졌다.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별 거 아닌 게 아니라는 걸 시간이 지날수록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나 입사한 지 20년 가까이 된 선배들이 서로를 거의 동등한 입장으로 대하고 있다는 느낌이 어느샌가 들기 시작했다. 뭐랄까 이건 대학교의 동아리 같은 느낌도 살짝 들고, 해외에서 일할 때 외국인 동료들과 영어나 중국어로 의사소통하던 때의 느낌도 드는 거였다.
물론 완벽할 수는 없다. 비록 서로 존대하고 영어 이름을 부르지만 여전히 나이의 차이와 엄연한 회사 근속연수의 차이가 존재했다. 사람에 따라서 이러한 차이에 더 민감하게 대응하는 사람이 있고, 비교적 무던하게 생각하고 마치 친구처럼 대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새로운 문화는 내가 새 회사에서 얻을 수 있는 보너스 혹은 직원 복지와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좋다. 비록 아는 이 아무도 없던 낯선 직장에 들어왔지만, 같이 일하는 동료들과 나이나 직급에 구애받지 않고 편하게 서로를 대하다 보니 친구들이 많아진 느낌이다. 이 조직에서 비록 내가 평균 나이를 높이는 축에 속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나보다 젊은 친구들이 나를 편하게 대해 주니 그들과 더 친밀해진 것 같고 격식과 허물이 덜해진 것 같아 퍽 만족스럽게 느끼고 있다.
1차 면접
[2017년 10월]
서류 전형에 합격한 후 1차 면접이 진행되고 있었다. 면접자 대기실에는 이미 두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대략 40대 초중반에 걸쳐 있는 나이대로 보였다. 다들 초면이었지만 자주 그러했듯이 먼저 말을 걸었다. 살짝 긴장감이 도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말을 텄고 입사를 위한 여정에 함께 하는 동질감을 느끼면서도 서로가 경쟁자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서울에 본사를 둔 이 교육 서비스 기업은 약 20년 전부터 해외 시장에 진출했다고 한다. 약 20개 나라에 법인 혹은 프랜차이즈 방식으로 들어가 교육 서비스 사업을 하고 있었다. 비즈니스 모델은 오프라인 '러닝센터'에서 현지의 유아/초중고 학생들에게 자체 개발한 교재를 이용해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것이다. 교사는 학생들을 끼고 가르친다기보다는 스스로 학습이 가능하도록 계단식으로 설계된 교재를 학생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코치한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른바 'SDL(Self-Directed Learning)' 원리를 적용하고 있었다. 이를 우리말로 풀면 '자기 주도 학습'이라 표현할 수 있다.
회사는 이번에 해외법인에서 이러한 교육 서비스 비즈니스를 책임지고 확대해 나갈 사람을 찾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기업이 반드시 교육 전문가만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진출하고자 하는 특정 나라에서의 비즈니스 경력과 특정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해외경력의 인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날 면접대기실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경력의 상당 부분이 해외 주재 혹은 해외 비즈니스와 관련된 업무였다.
캐나다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서 IT 스타트업 회사를 동업자와 직접 세워 경영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미국에서만 거의 반평생 살았다는 어떤 풍채 좋은 남자는 와인 수출입 전문가였다. 영국에서 몇 년 인도네시아에서 몇 년 일했다는 의류와 면방 필드의 영업맨도 있었고 나처럼 일본이나 중국에서의 비즈니스 경력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 오, 이력에서 보니 글을 쓰신다구요? "
" 전업작가는 아니구요. 일본에서 3년 정도 전부터 브런치라고 다음카카오톡에서 만든 글쓰기 플랫폼인 브런치에다 글을 올리고 있어요."
" 브런치 저도 실은 구독하고 있는데, 브런치가 다른 블로그에 비해 글쓰기에 좋은가요? "
" 아, 제가 생각할 때 브런치는 모바일 시대에 매우 적합한 툴인 것 같습니다. 글은 PC로도 쓰지만, 종종 스마트폰으로 커피숍이나 외출해서 잠시 머무르는 공간에서도 사진과 함께 글을 바로 올리곤 합니다. 전체적으로 사진이나 글을 올리고 편집하는 데 매우 최적화되어 있어 브런치를 이용해서 더 많은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
" 지금 말씀하신 내용들을 영어로 다시 한번 표현해 주실 수 있으세요? "
갑작스런 요청이었지만 얼굴을 두텁게 하고 면접관의 질문에 머릿속에 떠 오르는 영어 표현들을 갖다 붙여 답변을 이어갔다. 내 옆에서 같이 면접을 보던 IT 전문가는 면접관의 돌연스런 영어 답변 요청에 당황했는지 영어로 말문을 떼어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일어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세 명의 면접관들 중 가운데 착석해 있던 그 여성분은 매우 날씬하고 큰 키로 보였는데 면접자들에게 가장 많은 질문을 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그녀의 눈빛은 호기심 반, 상대를 판단하는 냉정함 반이 섞여 있는 듯했다. 그때는 그녀가 회사에서 어떤 위치에 있고 나와 어떤 인연으로 이어질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