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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Feb 17. 2018

배우 김주혁

내 멋대로 추억하는 김주혁

'배우'라는 직업


 19년 차 직장인으로 살면서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솔직히 오랜 시간 같은 직종에서 반복되는 상황의 비슷한 일들을 하다 보면 지치게 되고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배우라는 직업도 정작 본인들은 일로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려운 점도 많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치고 힘들어질 순간이 오긴 할 것이다. 


 그래도 부럽다. 유명 배우들의 부와 명예도 물론 부러운 점이지만, 그보다는 온전히 다른 사람으로 살아 볼 수 있다는 점이 부럽다. 샐러리맨으로 어떤 틀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불쑥불쑥 뛰쳐나가고 싶어 진다. 공간이동을 해서 다른 세상에 툭 떨어지고 싶어지기도 한다. 모습을 완전히 바꾸어 다른 사람으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해 본다. 보통 사람들의 마음일 테지. 나만 그럴까.


 시간이 비어 평소 인적이 비교적 드문 집 근처 영화관을 찾았다. 찍어 둔 영화가 없었기 때문에 상영 중인 영화 제목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대략적인 후보를 골랐다. 


 참, 최근 영화를 고르는 기준이 달라졌다. 해외 출장과 여행을 다니면서 장기간 비행을 할 때 객실에서 영화를 자주 보게 되는데 그때 깨달은 게 있어서다. 출장이나 여행이야 18년 동안 계속 다녔는데 최근 들어 기준이 달라진 것은 갑자기 그렇게 되었다기보다는 그런 믿음이 점점 더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말하자면, 재미있을 것 같이 생각되는 영화를 애써 포기하고 그냥 그럴 것 같은 영화를 골라 보는 것이다. 예전에는 시간이 생겨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게 되면 대부분 흥행하고 있거나 상영 전부터 대대적으로 홍보가 되고 있는 영화를 고르곤 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어떤 연유로 인해 별로 기대하지 않았고 재미있을 것 같지 않은 영화를 무심히 보다가 빠져들고 무척 흥미롭게 감상했던 경험을 반복해서 하게 됐다. 


 이번에도 구미가 당기는 영화는 '그것만이 내 세상' 혹은 '골든슬럼버'였는데 선택은 다르게 했다. 감상한 영화는 '흥부'라는 사극이었다. 사극이라면 전쟁 씬이 나오는 방대한 스케일의 박진감 넘치는 영화가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선명탐정'이나 '흥부'는 처음에 별로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기품 있는 배우 '김주혁'


 그런데 '흥부'의 영화 정보를 훑어보니 이미 고인이 된 배우 '김주혁'이 출연 배우로 나와 있는 게 아닌가. 


 불과 얼마 전 교통사고 이후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사인으로 유명을 달리 한 배우 '김주혁'. 이미 세상을 떠난 이의 유작을 개봉 영화관에서 감상하는 느낌은 생소하면서도 먹먹했다. 


 반듯하고 성실한 이미지의 김주혁은 많은 영화들에서 그런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강렬하고 색채 짙은 역할이나 악역으로의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그러나 유작이 된 '흥부'에서는 역시나 그의 원래 이미지라고 할 수 있을 선하고 따뜻하며 정의로운 인물(조혁)로 등장하고 있었다. 


 굶주림과 핍박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돌보고 이끄는 민중의 지도자로 분한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에서마저 죽음을 맞이한다. 죽기에 앞서 인상적인 한 장면이 있었다. 조혁(김주혁 분)이 흥부(정우 분)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건네고 돌아서서 낡고 바랜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간다. 그런데 내 기억으로 그가 걸어가는 방향으로 주변은 온통 까만 어둠이었다. 색에 대한 기억이 맞을지 확신이 서지 않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조혁, 아니 김주혁이 그 암흑의 어둠 속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매우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 장면만큼은 '조혁'이라는 극 중 인물의 이미지에 '김주혁'이라는 배우가 겹쳐지는 것이었다.  


내 멋대로 추억하는 인간 '김주혁'


 72년생으로 알려져 있는 김주혁. 2017년 시월, 향년 마흔다섯의 그는 아마도 자신의 운명을 알지 못했을 거다. 아직 앞날이 창창하고 죽음이라는 단어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였다. 돌연 믿기 어려운 죽음을 맞이한 그의 소식을 듣고 많은 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비운의 소식을 접하고 가슴에 통증을 느낀 이유는 내가 그와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건 동시대를 살아냈던 비슷한 또래의 남자가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한 채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아끼는 삶으로부터 완전무결하게 분리되었다는 점이다. 차 사고가 난 이후 그의 차는 약간의 거리를 더 질주한 채 멈추었다고 한다.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을까. 만일 죽음을 예견했다면 죽기 직전까지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그의 목소리가 그립다. 연기나 마스크가 배우의 선호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 되겠지만 개인적으로 남자 배우들의 목소리에 꽤나 큰 영향을 받는 편이다. 음색과 톤이 멋지고 호소력 짙은 배우들이 몇몇 있다. 김주혁이 바로 그 배우들 중 하나였다. 맡은 역할에 따라 같은 배우의 목소리도 전달하는 느낌이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목소리와 발성의 기본 바탕이 훌륭한 배우들은 기본으로 점수를 먹고 들어가는 셈이다. 


 김주혁의 목소리는 인간미와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내 멋대로 평가하자면 그런 목소리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다. 그가 만일 사람에 대한 진심이 부족함에도 그런 보이스를 가질 수 있었다면 팬들을 기만하는 셈이 될 것이다.  


 쌍꺼풀 없는 아담한 눈, 그러나 자그마하고 갸름한 얼굴에 잘 어울렸던 그의 선한 눈매가 그리워질 것 같다. 누군가 영화를 찍으면서 그가 여배우 복이 많았다고 하더라. 생각해 보고 좀 찾아보니 손예진, 최지우, 려원, 김선아, 이요원, 이시영, 이윤지, 문근영, 한혜진, 엄정화, 천우희, 장진영, 이유영 등등 정말 내로라하는 여배우들과 수많은 영화를 찍었다. 그 가운데 손예진, 장진영, 천우희 등 김주혁과 두 번씩 작품을 만든 여배우들도 많았다는데 그의 반듯하고 점잖은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고개가 끄덕여진다. 


 에잇, 나이가 들었나 보다. 자꾸 여기저기서 들리는 나쁜 소식들이 쉽게 흘려지지 않을 때가 많아졌다. 


 나만 알고 그는 날 모르는데 새삼 그가 그립다. 장진영도 그립고 이은주도 그립다. 그리고 일찍이 세상을 뜬 내 친구도 친척 동생도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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