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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Jun 03. 2018

경의 중앙선을 타고

여름으로 들어가는 문앞에 서서

 비올 확률이 40%라는 예보가 무색하게 화창하고 들뜨는 날씨다. 약속을 일부러 잡지 않은 것은 혼자 하루를 통째로 누리기 위해서다.

 

 선풍기도 없는 집에서는 절대 이런 날을 즐길 수 없으므로 나간다. 반 쯤 읽은 '허삼관 매혈기'와 글쓰는 무기 무선 키보드를 백팩에 넣고 출발. 나가는 김에 쌓인 재활용 쓰레기 한 쇼핑백 더미를 처리하기로 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좀 드문 곳으로 가고 싶었다. 고속버스를 탈까 아니면 그냥 아무 시내노선버스나 타고 거리 구경하며 멀리 가 볼까. 그러나 발길은 신사역 지하철로 향한다. 날이 좀 더워서였는지 서늘한 곳으로 몸이 움직인 것 같다.


 지하철 노선도를 본다. 신사역으로부터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는 철로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살핀다. 20년 전과 비교하면 서울 시내로부터 갈 수 있는 거리가 먼 곳들이 참 많아졌다. 북쪽으로 경의중앙선이 파주와 문산까지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 구리, 팔당, 양평을 지나 용문과 지평까지 닿는다. 경춘선이 대성리, 청평, 가평을 지나 춘천까지 간다니 젊은 날 청춘의 추억이 아로새겨진 장소들이 지척에 있었나 갸우뚱해진다.


 옥수역에서 경의 중앙선으로 갈아탔다. 목적지는 방금 지도에서 본 팔당과 운길산이다. 두 곳 모두 경의 중앙선이 지나는 역이다. 이 노선을 이용하기는 처음일 것으로 기억한다. 의외로 열차에 빈 자리가 드문드문 나 있다. 냉방은 춥지도 덥지도 않게 적당한 온도로 유지되고 있다. 덕분에 스마트폰으로 자리에 앉아 유유히 글을 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하다.


 도농역을 지나 양정으로 향하는 중이다. 반대편으로 빠른 기차가 역을 지나쳐 간다.



 아, 역시 바깥 풍경이 보이는 편이 지하로 다니는 것보다 훨씬 좋다.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길로 갓 구워낸 목적지를 그리며 다가가는 기분은 또 어떤가. 오랜만에 안아 보는 자유로움과 평안이다.


 운길산역과  팔당역 가운데 어디로 갈까 생각하다 둘 다 가지 뭐 하고 정했다. 먼저 운길산이라는 델 가서 산책을 하고 시간 보며 한 역 돌아와 팔당도 들러 보려 한다.


 오늘 마음의 눈에 들어오는 좋은 풍경이 보이면 이곳에 올려 함께 나누고 싶다. 글은 잠시 멈추고...


[오후 3시 40분]


 운길산역에서 내려 걷다 보니 두물머리로 이어지는 다리를 만났다. 자전거와 사람만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며 눈이 편안해지는 물과 산과 하늘이 조화를 이루는  풍경을 구경했다. 키타큐슈에 살 때는 쉽게 볼 수 있었던 이런 자연의 자태를 서울로 온 뒤로는 어느 정도 작심을 해야만 접할 수 있다.


 제법 강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맞으며 한 시간 반 가량 걸었을까. 다리를 건너자마자 보이는 한 상점에서 음료수와 하드를 사 먹으려고 했다. 카운터에 물건을 올려 놓고 카드 결제가 가능한지 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금만 받는다고 한다.


그늘이 있는 이 지점에 벤치가 있다. 그늘이 져 시원했다.


 " 뭐 우린 큰 욕심은 없어요. 우리가 죽을 때 한 10억 정도만 있으면 우리가 없어도 큰 애가 한 20년 정도는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작은 애가 그거 좀 관리만 해 주면요. " 지체 장애가 있는 걸로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두물머리 산책을 나온 한 여인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 우리가 10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아끼고 모으면 얼마나 될까요. 1년에 천 만원? 이천 만원? 기껏해야 일이억이겠지요. 그래서 무주택자 자격으로 내 꺼하고 애기 아빠 꺼 집이나 분양 받아서 잘 해 보려고요. "

 화장실에 다녀 온 여인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가 다시 길을 재촉한다.


 아이가 앉아 있던 벤치의 빈 자리는 금세 새로운 행인으로 채워진다. 다들 여기가 시원하다며 한 마디씩 하며 잠시 쉬다 자리를 뜬다.



[오후 5시 40분]


  걷고 또 걸었더니 돌연 피로감이 몰려와 정신이 혼미해졌다. 눈앞의 잔물결이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가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팔짱을 끼고 쪽잠을 청했다.


 얼마나 잠을 잤는지 가늠하지 못한 채 눈을 뜨고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서 맑은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이틀동안 농구다 테니스다 열을 냈더니 발바닥과 어깨가 뭉치고 뻐근했다.


 올 때는 운길산역에서 내렸지만 오후 내내 여기저기 걷다 보니 돌아가는 길은 양수역으로 향하게 되었다. 일요일 해가 저물기 시작하는 양수리 마을은 한적했다. 자전거 도로를 따라 걷다가 길이 꺾이더니 오른편으로 숲이 나타났다.


 숲속은 기우는 햇살이 들이쳐 안으로부터 초록빛이 이파리 프리즘을 타고 빛나고 있었다. 도로에서 숲길로 들어서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영상통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는 동시에 눈앞에 회백색 산토끼가 보이는 거였다. 영상통화를 하던 어린 딸은 산토끼를 보자 큰 관심을 보였다. 아니, 내가 더 흥분했을지 모른다. 살그머니 토끼를 따라갔지만 영상통화로 들리는 가족들의 목소리 때문에 토끼는 자꾸 도망을 갔다. 마지막에 토끼가 어느 텃밭으로 들어갔는데 텃밭은 가는 나뭇가지로 경계를 세우고 비닐로 둘러싸여 있었다. 녀석은 비닐이 있는 줄도 모르고 텃밭으로 뛰어들었다가 비닐막에 튕겨져 나왔다. 그 모습이 우스웠다.


 평화로운 일요일 오후가 고단한 몸으로 저물어 간다. 사랑스러운 초여름 어느 날이 평안한 맘으로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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