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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Sep 17. 2018

 태풍에 갇힌 홍콩의 하루

홍콩을 강타한 태풍 망쿳(중국명 산죽) 피해


[홍콩섬 Saiwanho, 2018년 9월 15일 밤]

  홍콩 시내에서 사재기 열풍이 불었다고 했다. 별생각 없이 들른 동네 슈퍼에는 줄이 제법 길었다. 태풍 때문에 비상식량을 사야 한다는 생각은 못한 채 바나나 한 손, 아이스크림 한 통 그리고 계산하기 위해 줄을 서면서 발견한 한국 부대찌개 컵라면을 사들고 왔다.


[홍콩섬 북쪽 해변, 2018년 9월 16일 오전 8시 30분경]

 좀 더 제대로 된 먹거리를 사 왔어야 한다고 느낀 건 오늘 아침이었다. 시끄러운 바람 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세상은 어느새 음울한 영화 세트장으로 변해 있었다. 유리창은 흐르는 빗물로 바깥 풍경이 왜곡되어 보였다. 환풍기를 통해 들리는 바람 소리는 귀에 거슬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새되고 거칠었다. 평소보다 늦게 일어난 아침 허기가 느껴져 냉장고를 열었다. 사과를 깎았고 어제 사온 바나나를 먹었다. 밥을 먹고 싶었지만 쌀도 없었고 밑반찬도 없었다.



[9월 16일 오전 10시 15분]

 집 창문으로 바깥 풍경을 살피니 비바람이 몰아치는 모습이 선명했다. 빗방울이 부서져 흩날리는데 그 방향이 바다 쪽에서 육지 방향으로 거의 지면과 수평을 이루고 있었다. 바깥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고가도로에 드문드문 차가 지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과일을 먹긴 했지만 허기가 느껴져 라면을 끓였다. 지난번 아내가 남겨 두고 간 양배추가 있어 그걸 라면 끓일 때 같이 넣고 먹기로 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양배추 라면은 퍽 만족스러울 정도로 맛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맛있는 라면을 먹으면서 오늘 쌀밥을 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식당이나 쇼핑몰 모두 문을 열지 않을 것이기에 만일 나갈 수 있다 해도 답은 없어 보였다.


[9월 16일 오후 1시 40분]

 오늘 성당을 가지 못했다. 미리 준비하지도 못했지만 태풍 때문에 미사가 취소되었을 것이다. '별을 쫓는 아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우연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유튜브에 무료로 올라와 있는데 화질이 매우 좋았다. 아마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이 아닐까 했는데 알고 보니 그를 대신할 후예, '빛의 마술사'라고도 불리는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이었다.

 매우 아이러니컬한 공기 속에서 홀로 신비한 영상을 음미했다. 바깥세상은 아름드리나무를 꺾어 버리고 호텔 객실 창문들을 다 깨부수는 엄청난 태풍이 불어대는 현실. 귀를 거슬리게 하는 태풍 산죽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고요하고 비현실적인 스토리와 감탄을 절로 내뱉게 하는 그림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아파트가 흔들려서 어지럽다니...


[오후 2시 30분]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처음엔 왜 그런지 몰랐다. 그러나 몇 초 안에 이유를 깨달았다.

  고층 아파트인 집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창문 근처로 가서 다리를 모으고 똑바로 서 보았다.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몸을 똑바로 세우고 서 있으려니 몸이 전후좌우로 조금씩 흔들리는 거였다. 만일 집이 흔들리지 않는데 내 몸이 그렇게 흔들리는 것이라면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후에 지인으로부터 영상을 하나 받았는데 아파트 테라스에서 옆 건물을 수직으로 찍은 모습이었다. 그 안에는 건물이 앞뒤로 흔들리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건물이 곧 빠질 이처럼 흔들거리고 있다.


[오후 8시, 집 밖으로 나서다]

 바나나와 견과류 그리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아직 못다 한 이삿짐 정리를 하며 오후 시간을 보냈다. 혹시 집 창문이 깨질까 걱정이 되었다. 많은 집과 상점들이 창문에다 십자, 엑스자로 테이핑을 해 놓았다. 그렇게 한다고 깨질 창문이 안전한 건 아니지만 만일 창문이 깨졌을 때 테이핑한 창문이 보다 덜 위험하게 깨지도록 하려는 목적이 크다고 들었다.

 바람소리가 조금 줄어들고 비바람이 잦아든 것을 확인하고 집 밖으로 한 번 나서기로 했다. 수십층의 고층 아파트인 우리집은 원래 6층에서 엘리베이터를 내려 1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로 갈아타야 한다. 평소 습관대로 6층에 내렸는데 바깥으로 나가는 출입문을 봉쇄해 놓았다. 경비원은 광동말로 뭐라 뭐라 말하는데 어휘는 몰랐지만 의미는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6층 로비는 바다로 향해 있으니 위험해서 막아 놓았다. 1층이나 2층으로 가서 Ground층으로 가라." 뭐, 대충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태풍이 할퀴고 간 자리


 궁금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집안에 박혀 외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과연 바깥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바람이 잦아들긴 했지만 혹시나 나가자마자 나도 날아가 버리는 건 아닐까.


 그라운드층(우리의 1층에 해당)으로 가서 건물 밖으로 나오니 여기가 과연 어젯밤 내가 들어왔던 길인가 싶었다. 특히 높게 솟아 있던 가로수들이 꺾여 큰길을 가로막아 버린 광경을 목도하면서 이번 태풍이 얼마나 파괴력이 컸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일 나무가 쓰러질 때 근처를 거닐고 있었다면 목숨이 위태로울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전 어떤 기사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과거 홍콩의 태풍으로 인해 간판이 떨어져 날아가 길을 가던 행인의 머리를 강타해 사람이 즉사했었다고 한다. 이번 태풍은 너무도 강력해 홍콩 시민 대부분은 미리 경고를 접하고 바깥출입을 자제해서 이런 피해가 적지 않았을까 기대해 보지만 각종 뉴스와 시민들의 제보를 보니 더 하면 더했지 피해가 결코 작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삶의 터전인 식당과 사무실 등에 강도처럼 물길이 들이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었다. 우리 회사의 교육 센터들도 피해가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홍콩/마카오에만 110개가 넘는데 모두들 큰 탈 없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히 빌어 본다. 내일 회사 옆에 있는 직영 센터로 곧장 가서 상황이 어떤지 확인해야겠다. 뱃고동 소리를 내던 화장실이 혹시나 터졌으면 정말 큰일인데...


하루종일 갇혀 있다 저녁 8시 반 경 나선 동네 거리, 가로수들이 처참하게 꺾이고 쓰러져 있다.
태풍이 거의 지나가고 난 후 조심스럽게 나와 본 거리 풍경 [홍콩 사이완호 저녁 8시 반]
오늘 홍콩 전체를 돌았을 피해 영상
함부로 나다녔다가는 한 대 크게 얻어맞을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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