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지갑을 잃은 건 언제?
마지막으로 지갑을 잃어버린 지가 얼마나 되었지? 10년쯤 전이었나? 15년쯤 전이었을까?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실제로 잃어버린 적이 없던 게 아닐까?
시간으로 생각하니 잘 기억이 나질 않아. 살았던 곳을 기준으로 가늠해 보자. 일단 일본에서 살았던 5년 동안에는 잃어버린 적이 없다. 오사카의 한 쇼핑몰에서 소변기 위에 지갑을 두고 화장실을 나온 뒤 10분 정도 후에 지갑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부리나케 뛰어 화장실을 수색했으나 지갑은 보이질 않았다. 쇼핑몰의 안전요원에게 신고를 하고 스스로의 부주의함을 탓하며 끌탕을 하던 중 연락을 받았다. 지갑을 누가 분실물 센터에 맡겨 주었다고. 약 20분 정도 안절부절못하며 애꿎은 일진을 탓했지만 무사히 지갑과 상봉했다. 그리고 식당에서 또는 남의 집에서 지갑을 두고 나와 소동을 피웠던 적이 몇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주 화요일 밤 10시경]
홍콩 아이랜드 북동쪽 싸이완호 테니스장
9시 반까지 테니스 복식 세 게임을 끝내고 잔뜩 목이 말라 코트 바깥에 있는 자판기로 향했다. 악토퍼스 카드를 꺼내 비타민 음료수를 꺼내 마셨다. 홍콩에 처음 왔을 때는 지폐나 동전을 써서 음료수를 뽑아 먹었는데 매번 잔돈이 남아 귀찮았다. 그러다가 '문어 카드' (Octopus Card: 홍콩 생활필수품으로 충전식 교통카드, 각종 식당과 편의점 등에서도 결제가 가능하다)를 얻게 되어 잔돈에서 좀 벗어나게 됐다.
그날은 멤버들이 좀 많아서 한 게임을 쉬고 10시부터 다음 게임에 들어갈 상황이었다. 자판기 옆 벤치에 앉아 뉴스도 읽고, 브런치에 글도 쓰고, 지인들과 메시지도 좀 주고받으며 시간을 잘 보내고 있었다. 10시 종이 울렸다. (이 테니스장은 마치 학교에서 쉬는 시간과 수업 시간 종이 울리는 것처럼 매 30분 단위로 종을 울려 준다) 벤치에서 급히 일어나 코트로 향했다. 미리 벽에 걸린 보드판에 붙인 이름자석의 순서대로 두 코트에 여덟 명이 들어갔다. 컨디션이 꽤 좋았기 때문에 이날 거의 모든 게임을 쉽게 풀었고 승률이 높았다.
11시까지 마지막 게임을 신나게 끝내고 가방을 챙겨 코트 밖으로 빠져나올 때였다. 다시 목이 말라 음료수 하나를 더 마셔야겠다 생각하고 가방 속으로 손을 넣어 지갑을 더듬어 찾았다. 바로 손에 잡혀야 할 지갑이, 가방 속 깊숙이 손을 헤짚어 보아도 전혀 감이 없는 것이었다. 당황한 나는 테니스 가방을 크게 열어 눈으로 가방 속을 확인해 보았다.
없어졌다. 지갑이 사라졌다. 순간 온몸에 식은땀이 쭈욱 흐르는 게 느껴졌다. 찰나에 머릿속 화면은 시간을 거슬러 지갑이 마지막으로 곁에 있던 시점까지 순식간에 돌아갔다. 그 시점은 바로 9시 반부터 10시 사이 코트 바깥에 설치된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꺼내 마시며 벤치에 앉아 있던 시간. 악토퍼스 카드를 지갑에 다시 꽂고 난 후 벤치에 앉아 손전화기를 볼 때 앉은자리 근처에 지갑을 둔 것이 틀림없었다. 스마트폰에 정신을 팔고 있다가 10시 종이 퍽 시끄러운 소리를 울렸고 나는 지갑을 내팽개친 채 테니스 코트로 뛰어들어간 것이었다.
클럽 멤버들에게 지갑을 분실했다고 말했다. 테니스 친구들은 술렁이며 함께 걱정해 주었다. 경찰에 신고를 하라는 사람도 있었고, 빨리 테니스 예약 사무실에 자초지종을 알리라는 사람도 있었다.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밤 11시가 지난 시각이라 경찰을 부르고 절차를 밟아 서류를 작성하는 등의 일들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그곳에 CCTV도 없었기 때문에 경찰을 불러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테니스장 입구에 있는 사무실 직원에게는 내 연락처와 함께 잃어버린 지갑과 그 안의 내용물에 대해 적어 건넸다.
직원의 배려로 닫힌 테니스장 문을 다시 열어 코트를 한 번 둘러보았다. 가방이 있던 자리와 주변을 살폈지만 지갑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코트를 나와 자판기 옆의 벤치를 다시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역시 그곳에도 행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백열등 불빛을 받으며 벤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 앤디! 지갑 못 찾은 거야? "
" 응, 안 보이네. 누가 가지고 간 것 같아. "
" 아후, 어떻게 해. 나도 몇 번 잃어버린 적 있는데 운이 좋으면 신분증은 돌려받기도 했어.
너무 속상하겠다. 근데 빨리 카드 회사에 분실신고는 해 둬. "
" 응, 그래야지. 근데 밤이라 그런지 연락이 잘 안 되네. 난 괜찮으니까 먼저 집에 가. "
" 내가 뭐 도와줄 일이 없을까? "
그때 더욱 목이 탔다. 그에게 겸연쩍은 미소를 띠며 괜찮으면 음료수 하나만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오우! 하는 감탄사를 내뱉으며 급히 품속에서 지갑을 꺼냈고 자판기에서 차디찬 캔음료를 하나 뽑아 주었다. 일본에서도 즐겨 마시던 비타민C 음료수였다. 허탈하고 퍽 곤란한 지경이었는데 그가 사 준 음료수는 무척 상큼하고 시원하게 느껴졌다.
지갑을 잃어버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이후로 아무런 소식은 없다. 제대로 완전히 잃어버린 거다. 당일은 아니지만 이틀 정도 뒤에 홍콩 경찰서 홈페이지에 지갑 도난 신고도 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처럼 거기서도 피드백은 없었다.
한국 운전면허증, 현금카드, 한국 신용카드 두 장과 일본에서 쓰던 카드 한 장, 아마도 500 홍콩달러 정도 충전되어 있었을 악토퍼스 카드 두 장, 현금 600 홍콩달러 정도, 명함 등등. 지갑과 함께 사라진 물품 목록이다.
신용카드 분실신고는 단번에 쉽게 되지 않았다. 해외에서 전화를 걸고 홈페이지를 뒤지고 하다가 어찌어찌 신고를 하긴 했다. 현지 은행의 현금 카드는 밤에 분실신고 접수가 되질 않아 낮에 직접 은행에 찾아가서 신고를 했다. 이런 과정이 불편했다. 분실된 카드가 어디서 무단으로 사용되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앞으로는 운동하러 갈 때 지갑을 들고나가지 말고 딱 충전식 악토퍼스 카드만 들고나가야지 하고 생각했다. 이 고칠 수 없는 건망증에 대해서도 자아비판하면서 새로 지갑을 장만하면 지갑 속에 중요한 걸 많이 지니고 다니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인생에서 드물게 지갑을 잃어버리는 체험을 했다. 그런데 너무 불편하고 너무 짜증 날 것만 같았던 경험이 막상 벌어지고 나니 생각보다 싱겁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다음날 출근하던 길은 무언가 홀가분하고 가벼운 느낌마저 드는 묘한 현상이 있었다. 물론 실제로 내가 당한 충격이 그리 크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다. 누군가는 '지갑 분실하고 아직 정신 못 차렸네!' 하며 한 마디 할지 모르겠다.
새 직장에 들어왔고, 새로운 곳에 발령받아 일을 시작한 지 3개월이 지나는 시점에서 지갑을 잃어버렸다. 머리와 가슴에 묵직한 것이 들어차 답답하고 힘에 겨운 시간들이 많이 있었다. 부정적인 마음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나의 지혜와 힘만으로는 문제를 쉽게 풀기 어려운 상황처럼 느껴지곤 했다. 지갑을 잃은 사건은 명백히 나의 불운이지만, 그게 또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의도적으로 의미를 갖다 붙이려는 시도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지갑 분실보다 더한 불운이 생길 수도 있는데 이 정도에 그치면서 삶은 나에게 돌아볼 기회를 주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류시화 시인은 어떤 글에서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나에게 각자 의미가 있다고 했다. 잠시 만나 한때를 공유하는 사람이 있고, 평생을 교류하며 연이 이어지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나의 인생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기 위해 나와 만나게 된다는 거였다. 지갑을 잃은 사건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지는 것과는 다르지만, 이 시점에서 나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
그래도 내일 지갑이 내 눈앞에 짠 하고 돌아온다면
거기서 또 나는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