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맨 더스틴 호프만과 꼭 닮은 꽃미남이 갑자기 화면에 등장해 깜짝 놀랐다. 오뚝한 콧날에 그림 같이 아름다운 눈썹. 과하지 않은 쌍꺼풀에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몸에 꼭 맞는 맞춤 양복의 옷맵시. 남자인 내가 비행기 좌석에 앉아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의 수려한 용모를 쫓아다니고 있었다.
꼭 닮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수려한 완소남은 더스틴 호프만의 젊은 시절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고전 영화를 자주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은데 비행기를 타면 클래식 코너에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는 옛날 영화들이 모여 있다. 예전엔 최신 영화 리스트에서 주로 골라 영화 감상을 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엔 고전 영화를 선택하는 경우가 제법 많아졌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걸까. 아마도 그런 영향이 있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아냐,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난 10대 혹은 20대에도 왠지 모르게 오래된 것에 향수와 그리움을 느끼곤 했었다. 오래된 사진이나 엽서, 묵은 책, 낡았지만 기품 있는 가구나 소품, 병풍 속의 그림, 그릇 등등.
세월은 인간에게서 젊음을 앗아가면서 동시에 수려한 외모를 몰라보게 만든다. 중년이나 노년이 되어서도 ' 아, 저분은 젊었을 때 정말 잘 생기셨을 거야. ' 혹은 ' 젊은 시절 상당한 미모를 뽐내셨겠구나. ' 하는 평가를 받을 만큼의 외모를 간직한 사람들도 있지만, 아닌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솔직히 더스틴 호프만에 대해서는 외모를 기대하며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의 젊은 시절 모습도 궁금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영화 '졸업'을 통해 그의 젊은 시절 수려한 모습에 그만 깜짝 놀라고 만 것이다.
아버지의 동업자 부인인 미시즈 로빈슨은 벤자민(더스틴 호프만)에겐 엄마뻘 나이지만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흘러넘치는 여인이다. 나이 차이를 생각하면 그런 연상의 여인이 아무리 유혹한다고 해도 넘어가지지 않을 것 같은데 이건 격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로빈슨 부인은 아마도 사십 대 초중반에 불과했을 것이고, 젊은 여인 못지않은 날씬한 몸매와 이목구비 뚜렷한 아름다운 얼굴 생김새를 가지고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중산층의 부모님이 사시는 고향으로 돌아온 벤자민은 자신을 위해 준비된 명문대 졸업 축하 파티에서 혼자만 기분이 다운되어 있다.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정작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방황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의 집안 사정을 보면 아버지는 제법 잘 나가는 사업가로 형편이 상당히 좋은 것으로 묘사된다.
금수저까지는 아니더라도 은수저 정도는 가지고 태어난 그의 이러한 고민과 방황이 일견 엄살로 비치거나 그다지 심각하지 않은 일로 여겨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에게 닥친 문제는 매우 무겁고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스트레스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1999~ 2000년 당시를 생각해 봐도 불확실한 미래는 상당한 압박감을 주었고 일상의 평온함을 온전히 누릴 수 없게 만들곤 했다. 집이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를 떠나 제대로 된 젊은이라면 학생 신분에서 사회인으로 변태하면서 피할 수 없이 겪어내야 하는 과정인 것이다.
꽃다운 벤자민은 로빈슨 부인의 집요하고 교묘한 유혹에 결국 넘어가고 만다. 그가 처음부터 쉽게 무릎을 꿇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웃집 어른이자, 동년배 친구 일레인의 엄마인 그녀의 유혹이 퍽이나 당황스러웠다. 큰 목소리로 항의하며 그 덫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 그 덫이 몇 번의 몸짓으로 떨쳐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인가. 이미 그녀는 먹잇감을 정했고, 크게 한 입 베어 물기 전까지는 절대 놓아줄 수 없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마치 내가 유혹을 받는 것처럼 괴로웠다. 저 젊고 순수한 친구가 어떻게 저런 시험에 빠지게 되었을까. 과연 그 고통스러운 순간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예감했던 대로 그는 거미줄에 걸려들고 만다. 한 번 걸려드는 게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스스로 거미줄에 달려든다. 아무런 죄책감도 생각도 없이 그저 욕망이 이끄는 대로 나아갈 뿐이다.
그가 만일 이다음에 벌어질 운명적 만남에 대해 알 길이 있었다면 모든 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다. 인간이 어찌 앞날을, 단 10초 후의 일이라도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던 순간이 바로 벤자민에게 닥친 그 운명적 만남이었다. 모든 걸 지우고 싶고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고 싶게 만들었던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누구에게나 어떤 시점에서 그것이 아니고, 다른 선택을 했으면 좋았으리라 여겨지는 일들이 틀림없이 존재할 것이다.
1967년작이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에 나온 거다. 5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만났지만, 영화의 메시지는 아무런 어색함 없이 머리와 마음 안쪽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다음번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 다시 클래식 코너에서 보석처럼 묵힌 영화를 골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