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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Sep 14. 2019

어느 날씨 좋은 날

 일 년 내내 이랬으면 좋겠다 싶을 날씨였다. 하늘은 높고 파랬다. 나뭇잎들은 투명한 연두와 초록으로 빛나고 있었다. 자주 보지 못하는 남동생의 딸, 그러니까 조카딸과 놀이터에서 실컷 놀면서 이 축복의 날을 만끽하고 감사했다.


 조금 서먹한 느낌이 들던 제수씨와 이번 추석엔 제법 길고 많은 수다를 떨며 드물게 주어지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남동생과는 전화든 대면이든 늘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가질 수 있었지만 내 사랑하는 동생의 아내와는 그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적었다. 명절이라는 기회를 빌어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동생의 가장 소중한 사람과도 가까운 느낌이 들어 참 좋았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 있다. 월급을 받던 샐러리맨에서 법인 사업자로 변신한 지 반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직도 옷이 몸에 꼭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한다. 일이 일정하게 돌아가고 어떤 정형화된 생활패턴이 생기면 이런 느낌에서 벗어나게 될까. 이 느낌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19년 가까이 회사라는 조직의 일원으로 살다가 개인 사업자로 신분을 바꾼 뒤, 하루하루 주어지는 시간을 나의 주관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점은 커다란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게 해 주었다. 규칙적인  출퇴근 생활의 오랜 습관은 아직도 몸과 마음에 남아, 새로운 환경 아래 살아가는 나에게 적지 않은 육체적 심리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중년의 나이가 된 아들은 칠순이 넘으신 부모의 집으로 오면 다시 어려지는 기분이 든다. 어머니께서 차려 주시는 음식을 먹고, 어머니께서 손수 만들어 주신 잠자리에서 잠을 자면, 중년의 아들은 다시 어린 시절 그 마음으로 돌아가는 착각에 빠진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 있겠는가. 그 시간이 아주 오래 남지 않았다는 걸 상기하면,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기도 한다.


 지난밤 동생과 단둘이서 영화를 부모님 댁 거실에서 함께 보았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 다소 다큐멘터리와 같은 분위기를 풍기며 차분하게 진행되던 영화는 소리의 조용함과는 달리 마음속에 많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놀랍게도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영화 인터스텔라의 후반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명확히 이해할 수 없는 우주와 물리학의 현상과 이야기들이 인간과 삶에 대한 애잔함, 고독, 적막함, 두려움과 공포, 신비감, 경외, 호연지기, 초월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했다.


 동생의 졸업 사진이 걸려 있는 방에는 오로지 백색소음만이 귓가에 스치고 있다. 노부모께서 가까이 잠들어 계신 이 밤 중년의 아들은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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