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성사는 정말이지...
고해성사는 힘들어!
고해성사를 할까 말까. 이제 부활절도 얼마 안 남았는데 판공성사를 봐야 하는데...
켄타로는 지금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하는 내내 고민하고 있다. 특히 제대 앞에서 두 팔을 벌리고 성찬의 전례를 집행하고 있는 저 키 크고 잘 생긴 신부를 보면서 말이다.
얼마 전 이 일본의 작은 소도시 나카마로 부임한 신부는 한국에서 왔다고 한다. 한국의 신학교에서는 지금도 꾸준히 신학생들이 입학하고 있고 매년 수십수백 명의 새 신부가 배출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일본은 사정이 달랐다. 천주교의 역사가 제법 긴 일본이지만 작금의 일본에서는 천주교의 교세가 날로 쇠퇴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당에 매주 나오는 신자들을 봐도 젊은이나 아이들보다는 60대 이상 노년층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켄타로는 이 작은 성당에서 몇 안 되는 젊은 남자에 속했다. 오랫동안 일요일이 되면 성당에 나가 미사 참례를 해왔기 때문에 특별히 신앙심이 깊어서 라기보다는 일종의 패턴처럼 된 것이다. 이런 습관처럼 되어 버린 신앙은 문제가 있다고 느꼈지만 그렇다고 크게 부끄럽다거나 당장 개선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그였다.
아주 가끔은 고해성사 때문에 개신교로 개종할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 그다.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 수가 50명이 채 될까 말까 하는 작은 성당이기 때문에 주임 신부는 신자들 대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켄타로는 신부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 세대차도 없고 해서 가끔 식사도 같이 하고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나름 가깝게 지내다 보니 고해성사가 문제였다. 고해실에 들어가면 신부와 신자석이 중간 칸막이로 가려져 있다. 그러나 소리가 통하도록 나무 창살 같은 것이 붙어 있는 작은 구멍이 나 있다. 그리로 신자가 죄를 고백하고 신부가 들으면서 신자에게 신앙적 조언을 해준다. 죄 고백이 끝나면 보속으로 묵주기도나 여타 기도 또는 선행을 지시한다. 문제는 이렇게 가까이서 말하다 보면 누가 누군지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켄타로처럼 신자들 가운데 비교적 신부와 가까운 축은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켄타로는 이것이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죄를 고백할 때 신부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신의 대리자로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적 부끄러움 같은 건 다 버리고 온전히 신께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죄의 사함을 받아야 한다.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다. 잘 알지만 그래도 남한테 얘기하기 싫은 죄, 정말 부끄러운 죄를 잘 아는 사람 - 그가 신부라 할지라도 - 한테 고백하는 행위는 너무너무 싫고 힘들다.
미사가 끝났다. 미사 전에는 신부가 고해실에 들어가 앉아 있기 때문에 가서 줄만 서면 고해성사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미사가 끝난 후에는 개인적으로 부탁을 해야 고해성사를 준다. 켄타로는 부탁하지 않았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