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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드레아 Apr 11. 2016

머리 깎으려다 산책한다

키타큐슈의 매력

키타큐슈 와카마츠 히비키노미나미 주택가

  머리가 꽤 자랐다. 이발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지 이주는 된 것 같다. 테니스를 한다 사람을 만난다 여행을 간다 이런저런 우선순위에 밀린 머리깎기는 자꾸 미뤄졌다.


   오늘 드디어 적당한 상황이 되었다. 회사에서 조금 일찍 돌아오게 되었고 마침 아무 저녁 일정이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집근처 헤어살롱(일본에선 미용실 간판에 이런 표현이 자주 쓰인다.)으로 향했다.

  그 미용실은 주택가 안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데 가는 길에 해가 뉘엿뉘엿 그림자가 길어지는 풍경이 좋았다. 정원을 이쁘게 가꾼 집들을 구경하며 중간에 사진도 한 방. 찰칵.


  앗! 근데 헤어살롱의 문이 닫혀 있다. 유리창 안쪽을 살펴봐도 인기척이 없다. 발길을 돌려 다른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주택가를 벗어나 조금 큰 도로로 나섰는데 작년에 새벽 운동을 하다 내 발길을 붙든 밭길이 눈에 들어온다.


  에라. 머리는 나중에 깎고 먼저 논밭길 산책 먼저 해야지.

작년 여름 가끔씩 들르던 길이다. 그때는 빨간게들이 논두렁과 오솔길 사이로 무척 많이들 다니고 있었는데 지금은 철이 아니다.


  논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데 작은 불도저가 한 대 서있고 그 뒤로 속살이 깊게 패인 언덕이 나왔다.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나무의 뿌리가 다 드러나 있다. 위태위태하다.  드러난 뿌리들이 익숙한 기억 속의 장면을 끄집어낸다.

   바로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보던 하늘을 떠다니던 나무들의 뿌리.

천공의 성 라퓨타를 떠올리게 한다
말라버린 샛강과 버려져 이끼가 낀 자전거

  오늘 날씨가 4월의 봄날 같지 않게 제법 쌀쌀하다. 옷깃을 여미고 빨간게들과의 추억이 있는 근처 샛강 마을로 접어든다. 해는 점점 기울고 있고 그림자들은 쭈욱쭈욱 엿가락처럼 늘어진다.


  이런 산책이 참 좋다. 아무 계획없이 그냥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간다. 시간도 내 맘대로다. 새벽 출근 전의 산책에 비해 시간 여유도 많다.


   샛강 마을 안쪽으로 들어서니 왼편 야산에 아직 컬러풀한 경치가 남아 있는 게 아닌가. 그 알록달록한 모습을 감탄하며 보고 있자니 야산 바로 아랫집에 사시는 노부부가 눈빛을 건넨다.

나는 "와, 기레이데스네(이쁘네요)" 한 마디 하며 눈빛에 대답한다. 바깥양반되시는 분이 일이주 전이 정말 절정이었다고 나 대신 안타까와해 주셨다.

  어여쁜 풍경을 뒤로 하고 좀더 걸어 들어간다. 누군가 가꾸고 있는 텃밭들을 지나 야산쪽으로 들어가 봤다.


   해가 기우는 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실제보다 어둡게 나온다. 반대로 야산 안쪽 어두운 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오히려 실제보다 퍽 밝게 나온다. 아마 어두운 배경에서는 사진기가 스스로 빛을 더 집어 넣나보다.


  혼자 걷는 이 시간. 약간의 외로움도 느껴지지만 그 느낌은 오히려 풍요로움을 더해주는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어제 당한 불의의 자동차 접촉사고와 그 사고를 일으킨 스무 살 남짓의 여자 운전자. (그 여자는 사고를 낸 후 차에서 내려 나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차량을 좀 한적한 곳으로 옮겨 이야기하자고 제안하고 함께 운전해 가는 중에 사라져 버렸다. 아니 내가 놓친 거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오늘 교통경찰과의 한나절. 썩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머리깎기 대신 택한 산책으로 그냥 맘 편히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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