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노래 (21) - 오성식의 굿모닝팝스를 추억하며
대학교 시절 같은 과 학우들의 절반 이상은 짧게는 6개월에서 보통 1년 정도 해외에서의 영어 연수를 다녀오곤 했다. 집에서 지원을 받을 형편이 못 됐던 그런 나에게 영어공부의 좋은 길잡이가 있었으니 바로 KBS에서 아침 6시부터 1시간 동안 방송된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라디오를 틀어놓고 이것저것 준비하고 밥도 먹던 시절이었다. 영어공부가 메인이었지만 좋은 팝송도 많이 틀어주다 보니 하루를 시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프로그램이었다. 영어공부를 좀 더 진지하게 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별도로 녹음을 해서 등하굣길에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들었고 노트를 만들어 표현을 정리하기도 했다.
잘 알려진 대로 오성식 씨는 영어 전공자가 아님에도 (외대 포르투갈어과 졸업), 본인의 관심과 노력으로 지명도 높은 영어강사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다 보니 그의 강의는 일반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 쉽고 재미있게 진행되었고, 밝고 재기 발랄한 방송 진행 방식은 듣는 사람의 몰입도를 높여줬다. 해외어학연수는 고사하고 (아직도) 아메리카 대륙을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이 다국적 기업에서 게다가 해외에 나와서 수년간 일할 수 있게 된 데는 대학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거의 매일 듣던 ‘오성식의 굿모닝 팝스’의 공이 일정 부분 있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방송을 통해 영어공부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방식으로 영어공부를 꾸준히 지속할 수 있게 해 준 기반을 닦아준 셈이다.
굿모닝팝스에서는 매주 한 곡씩 팝송을 선정해서 가사를 해석하며 ‘따라 부르기’를 했었는데, 지금도 내가 가사를 외우고 노래방에라도 갈라치면 한 번씩 부르게 되는 몇 안 되는 팝송들은 거의 전부 그 시절 배웠던 것 같다. 그때 공부했던 팝송 가사를 통해서 영어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통찰을 느끼기도 했고 삶에 대한 위안을 받기도 했다. 타국 언어로 공감의 메시지를 받았던 그 느낌은 지금까지도 내가 외국어를 공부함에 있어 큰 동기부여로 작용하고 있다.
내 기억에 왜곡이 있을 수 있지만, 굿모닝팝스에서 유난히 많이 소개된 가수들에는 비틀스, 카펜터즈, 엘튼존, 빌리조엘 등에 더해 로보(LOBO)가 있었다. 로보는 빌보드 싱글차트 상위에 여러 곡을 올릴 정도로 미국에서도 꽤 알려진 가수임에 틀림없지만, 상대적으로 한국에서 더 인기를 누려온 가수라고 보통 평가된다. 지금은 잘 안 쓰는 표현인 듯한데, ‘이지리스닝’ 팝스의 대명사라고 할 만큼 누구나 좋아하고 흥얼거리게 되는 멜로디와 편안한 보컬로 그야말로 한국에서 한 시대를 풍미한 가수이기도 하다. 영어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도 상대적으로 가사가 쉬운 편이고 따라 부르기에도 부담이 없어 로보의 곡들이 자주 소개 된 듯하다. “I 'd Love You To Want Me", ”Stoney” 등 다수의 히트곡들이 있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로보의 곡은 바로 이 노래였다.
How Can I Tell Her
가사를 자세히 보면 조금은 허무할 정도로 해석이 쉽다. 하지만, 제목만 보고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는 이런 내용의 가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어떻게 ‘당신’의 존재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까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외롭거나 힘들 때 내 곁에서 늘 내 삶을 지탱해 준 그녀에게 “사실 내 마음은 이제 새로운 사람에게 가 있다”라고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요? 가사의 흐름만 놓고 보면, 화자인 ‘내’가 오랜 연인인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얘기하면 좋을지, 지금 내 마음이 가 있는 새로운 상대(You)를 생각하며 독백하는 듯하다. 어쩌면 새로운 그녀에게 편지로 자신의 고민을 내 비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랜 연인이 이미 3인칭 ‘그녀’가 되었다는 점은 조금 쓸쓸함마저 느껴진다.
단순히 고리타분한 관점에서 보면 조강지처를 버리려는 나쁜 놈의 뻔뻔한 고뇌가 담긴 노래이지만, 가사 속의 상황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음악으로만 듣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서정적이고 편안할 수 없다.
She knows when I am lonesome
And she cries when I'm sad
She's up in the good times
She's down in the bad
Whenever I'm discouraged
She knows just what to do, but girl
She doesn't know about you
I can tell her my troubles
She makes them all seem right
I can make up excuses
Not to hold her at night
We can talk of tomorrow
I'll tell her things that I wanna do, but girl
How can I tell her about you?
…
How can I tell her, I don't miss her
Whenever I am away?
How can I say "It's you I think of"
Every single night and day?
But when is it easy telling someone the truth?
Oh girl, help me tell her about you
https://youtu.be/-aTK1 n1 yvUo? si=xrcZI3x3 wmriCCYw
사회에 나와서도 학창 시절을 보냈던 신촌의 뒷골목이 그리워 주말에 한 번씩 찾아가던 허름한 건물의 꼭대기층 바에서 맥주 마시며 언제나 이 노래를 신청해서 듣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이 노래가 사실은 이런 노래야’라고 잘난 체를 해가며 분위기를 잡던 어리바리 사회 초년생은 이제 조기은퇴를 꿈꾸는 50대 초반 아저씨가 되었고, 그때 조용히 내 얘기를 들어주며 코로나를 마시던 그녀는 내 아내가 되었다. 많은 것이 변했고 앞으로도 변하겠지만, 이 노래를 들으며 받았던 그 느낌은 언제나 그대로라는 사실이 반갑고 조금은 서글프다.
지금도 영어공부는 끝나지 않았지만, 내 젊은 날 영어공부와 더불어 팝송에 대한 최소한의 조예를 갖추게 해 준 굿모닝팝스의 디제이 오성식 선생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