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노래 (22) - 이승환 그리고 오태호
영원한 어린 왕자 이승환의 데뷔 앨범이 나온 게 1989년인데, 내 기억 속 이 노래는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90년 가을부터 입소문을 타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디지털 음원을 구매하거나 구독하여 듣는 게 일반적이지만, ‘응답하라 1990’ 시절이던 그 당시엔 나도 라디오 기능이 딸린 소형 카세트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며 음악을 들었다.
이승환은 tv출연을 거의 하지 않는 가수였기에 그의 데뷔앨범이 100만 장 이상 팔리는 소위 대박이 나게 된 건 순전히 라디오의 힘이 컸다. 타이틀곡인 <텅 빈 마음>이 뜨고 나서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 것은 그 당시 백지연 아나운서와 함께 MBC 여자 아나운서 전성시대를 이끌고 있던 정혜정 아나운서가 진행하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였다. 95.9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끝나고 12시부터 진행되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다. 유난히 ‘시인과촌장’이나 ‘봄여름가을겨울’ 등 tv에 잘 나오지 않는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곡을 많이 틀어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로 인해 수험생 시절엔 독서실 끝나고 귀갓길에,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뭔가 달뜬 느낌에 잠 못 이룰 때 종종 듣고는 했던 음악프로였다.
이 노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는 누군가를 사귀어 본 경험 한번 없고 미팅이나 소개팅에 나가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하던 소심한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에게 어떤 의미 판타지와 같은 곡이었다. 전주부터 가슴을 울리는 선율과 이승환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우러진 이 노래를 들으며 누군가를 만나기도 전부터 얼마나 많은 이별을 했는지 모른다. 아름답고 멋진 사랑을 꿈꾸지만 언젠가 가슴 아픈 이별도 한 번쯤 동경하던 철없이 감수성만 넘치던 시절이었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에 체크무늬가 들어간 식탁보가 씌워져 있던 단골 카페 구석진 자리에서 랜덤 하게 흐르던 노래들 중에 이 곡이 나오면 얼마나 설레면서 가슴 아팠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만 나온다.
‘기다린’ 날과 ‘지워질’ 날,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사랑을 둘러싼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절묘하게 넋두리처럼 이 노래에 녹아 있다. 주변에서 이 노래의 제목을 전부 미래형으로, 즉 ‘기다릴’ 날과 지워질 날로 묘사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는데, 쓸데없이 예민하던 나로서는 그들의 무신경함이 참 싫었던 기억이다. 사소한 문화적 감수성의 결핍에도 못 견뎌하던 아직 만 스무 살이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다 그대를 위했던 시간인데
이렇게 멀어져만 가는 그대 느낌은
더 이상 내게 무얼 바라나
수많은 의미도 필요치 않아
그저 웃는 그대 모습 보고 싶은데
더 언제까지 그대를 그리워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지금 떠난다면 볼 수도 없는데
그대를 사랑한단 그 말을 왜 못 하나
원하는 그대 앞에서 모아둔 시간도 이젠 없는데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
다 그대를 위했던 시간인걸
이렇게 멀어져만 가나 그대 떠나나
더 언제까지 그대를 그리워해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지금 떠난다면 볼 수도 없는데
그대를 사랑한다는 그 말을 왜 못 하나
원하는 그대 앞에서 모아둔 시간도 이젠 없는데
더 이상 내게 무얼 바라나
수많은 의미도 필요치 않아
그저 웃는 그대 모습 보고 싶은데
https://youtu.be/KkO_aO9YP5w?si=DO5w2xRunwkKjbQz
사실, 이승환의 1집 앨범에는 이 노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만큼이나 내 인생의 명곡이 하나 더 있다. 눈/물/로/시/를/써/도
어느 계절에 머무나 그대 떠난 계절이 또 있을까
이별의 흔적은 뒤늦게 찾아오니 떠나는 그댈 잡지 못했나
그날 가만히 내 두 눈을 바라보다 그대 눈물을 흘렸죠
그것이 마지막 진한 입맞춤 되어 나 역시 뒤돌아 울지요
기나긴 날 이제는 어떡하나요 눈물로 시를 써도 그댄 없는데
새로이 또 누구를 기다리나요 세상에 둘도 아닌 당신인 것을
사연이 너무 많아 찢어 버린 편지 그댄 그 의미를 아나요
그날 가만히 내 두 눈을 바라보다 그대 눈물을 흘렸죠
그것이 마지막 진한 입맞춤 되어 나 역시 뒤돌아 울지요
기나긴 날 이제는 어떡하나요 눈물로 시를 써도 그댄 없는데
새로이 또 누구를 기다리나요 세상에 둘도 아닌 당신인 것을
사연이 너무 많아 찢어 버린 편지 그댄 그 의미를 아나요
사랑은 말이 아닌 것을
이 노래는 사랑을 경험해 보기도 전에 제 멋대로 이별을 그려보게 만든 노래들 중 좀 더 매운맛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이루어낼 자신이 없어 그저 처량하고 슬픈 주인공의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하던 극 소심남 시절, 이 노래를 들으며 가을이 오롯이 나만의 계절인양 낙엽이 뒹굴던 어딘가 담벼락길을 얼마나 정처 없이 걸었는지 모른다. 35년 가까이 지나 그 당시 소년(?) 감성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노래만은 언제 들어도 너무 좋다. 진짜 명곡이다.
https://youtu.be/P5vermzL4ZU?si=Ys7QuFfIeNpuUss5
지금까지 이 두 곡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오태호가 만든 곡들이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발라드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로,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이문세의 영혼의 파트너인 이영훈이 있었다면, 90년대 초중반에는 오태호가 있었다. 또 다른 이승환의 노래 <세상에 뿌려진 사랑만큼>,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사이>, 가요톱텐 5주 연속 1위에 빛나던 이상우의 <하룻밤의 꿈>과 이범학의 <이별 아닌 이별>, 그리고 본인이 보컬로도 참여한 프로젝트 앨범 이오공감의 <한 사람을 위한 마음> 등등. 오태호 특유의 감성이 묻어나던 수많은 노래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강을 건널 때처럼 무엇을 해도 불안하고 걱정 많던 내 20대 초중반 시절 그야말로 징검다리가 되어 주곤 했다.
오태호가 만든 그 많은 명곡들 중, 노래방에서 가면 언제나 불렀던 노래로 故 홍성민의 대표곡 <기억날 그날이 와도>라는 노래가 있다.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와 어딘가 닮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무위키에 의하면 원래 <기다린 날도 지워질 날도>는 밴드 ‘공중전화’에서 같이 활동하던 홍성민이 참여한 Rock in Korea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이승환이 우연히 이 곡을 듣고 마음에 들어 오태호에게 붕장어 한 접시를 대접하고 인터셉트를 했다고 한다. 이에 오태호가 미안한 마음에 홍성민을 위해 밤새 한 곡을 새로 만들었는데, 그 노래가 바로 '기억날 그날이 와도'였다고 한다. 과연 천재가 아닐 수 없다.
https://youtu.be/WbbQ69dh47M?si=KIwvriT1LCQ5DY69
오태호가 만든 노래 중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곡이 바로 故 김현식이 부른 <내 사랑 내 곁에>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모두가 사랑하는 노래. 처음부터 김현식을 위해 만든 곡은 아니지만, 천재의 곡을 요절한 천재중 한 명인 김현식이 불러 더욱 그 느낌이 살았던 노래. 한없이 쓸쓸하면서 안타깝고 애절한 느낌으로 언제 들어도 명치끝을 아리게 하는 바로 그 노래. 2014년 EBS의 음악 프로그램인 스페이스공감 오태호 특집에서 보컬 없이 마지막 연주곡으로 흐르던 버전은 정말 명불허전이었다. 오태호가 뛰어난 작곡가 이전에 엄청난 실력파 기타리스트임을 확인시켜 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https://youtu.be/MRb5-IF9U28?si=cZ5vCORY8-E2X9VB
나의 청춘 앨범 속 수많은 장면에서 흐르던 주옥같은 명곡들을 만들어 주신 오태호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건강하고 문득문득 자주 행복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가끔씩은 근황과 함께 신곡 소식도 듣고 싶습니다. 이승환 옹과의 깜짝 콜라보 콘서트가 열리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도 해 봅니다. 원래 록커를 꿈꿨던 이승환 님은 페이스북 통해 이따금 소식을 접하고 있습니다. 음악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따뜻하면서도 단호한 관심 언제나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