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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고요한 기쁨이 스며드는 순간들

이해인 수녀의 문장에서 길어 올린 마음의 조각들

by 두기노

작년 말, 첫 직장의 팀장님이셨던 분께 선물 받은 이해인 수녀님의 《인생의 열 가지 생각》을 얼마 전에서야 꺼내 들었다. 책 욕심이 많다 보니 항상 읽을 책이 쌓여 있어, 반년이나 지난 뒤에야 비로소 펼쳐본 것이다. 기도하듯, 명상하듯 하루하루를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수녀님의 글 하나하나가 너무도 마음에 와닿아, 천천히 음미하며 아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읽은 뒤에도 언제든 다시 꺼내 볼 책이라는 확신이 들어, 평소엔 잘하지 않는 밑줄을 긋고 메모까지 해가며 읽고 있다.


특히 「기쁨」이라는 챕터에서는 거의 모든 문장을 필사하며 곱씹게 되었다. 성직자라는 직업의 특성상, 세상에 어느 정도 삶의 방향성과 선한 영향력을 제시할 수밖에 없겠지만, 투병을 겪은 뒤 수녀님은 더욱 삶의 소박한 기쁨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주변과 끊임없이 나누며 살아가고 계신다. 그런 수녀님의 행복한 모습이 글 속에 오롯이 담겨 있어, 잔잔한 감동이 마음 깊이 밀려왔다.

평범함 속에서도 비범함을 찾는 새로움, 그 평범함 속에 숨어 있는 행복을 찾는 비범함이 잘 사는 삶이고 내가 노력해서 얻는 내적인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누가 뺏어갈 수 없죠.

살아서 눈을 뜨는 것, 신발을 신는 것, 하늘과 바다와 꽃을 보는 것, 사람을 만나는 것 그리고 그날이 그날 같은 단조로운 일상의 시간표조차도 모두 새롭고 경이로운 감탄사로 다가옵니다. 살아서 누리는 평범하고 작은 기쁨들, 제가 마음의 눈을 뜨고 깨어 있으면 쉽게 느낄 수 있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이제 제 탓으로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기쁨 발견 연구원’이에요.”
일상의 조각들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작은 물건이나 순간에서 기쁨을 찾아 나누는 태도는 바로 소박한 행복의 힘입니다.

욕심을 조금만 줄이고 이기심을 조금만 버려도 기쁠 수 있다. 자만에 빠지지 말고 조금만 더 겸손하면 기쁠 수 있다. 남이 눈치채지 못하는 교만이나 허영이 싹틀 때 얼른 기도의 물에 마음을 담그면 기쁠 수 있다.

<인생의 열 가지 생각> 및 인터넷 검색 통해 발췌함


수녀님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지만, 나 역시 살아오는 동안 열 해에 한 번꼴로 큰 수술을 받고, 숱한 실수와 시련을 겪으며 어찌 보면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어떻게든 여기까지 살아왔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작고 고요한 기쁨이 얼마나 소중한지, 잔잔히 스며드는 소박한 행복이 얼마나 감사한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깊이 절감하며 살아가고 있다.


소심하고 겁 많고, 늘 불안과 걱정을 안고 살아온 내가 지금 이렇게 소소한 기쁨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처럼 느껴진다. 그것 또한 또 하나의 큰 기쁨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조용한 기쁨의 순간들을 온 마음으로 만끽하며 하루를 열심히 살아간다. 그리고 깨닫는다. 그런 기쁨의 순간들은 생각보다 거창하거나 특별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평범한 날, 아주 평범한 장면들 속에 고요히 숨어 있다.


평일에는 주 2회 정도 출근 전, 동네를 30분 이상 달린다. 계절에 따라 해가 뜨기 전의 어스름하거나 햇살이 퍼지기 시작한 길목을 따라, 혼자만의 리듬으로 뛰는 시간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정화해 준다. 주말이나 휴일엔 여유를 조금 더 내어,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동네를 목적지로 정하고 달려보기도 한다. 도착해선 천천히 골목을 산책한다. 낯선 풍경을 발견하는 그 순간, 단순한 운동이 일상 속의 작은 탐험으로 바뀐다.


동네를 달리거나 산책할 때면,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과 나무, 골목길 사이의 간판 하나에도 마음이 머물 때가 있다. 그럴 땐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는다. 꼭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만의 기록을 남기고픈 마음에 인스타그램에도 올린다. 그 작고 조용한 행위에서, 나는 소소한 쾌감을 느낀다.

여름이면 땀이 흠뻑 밴 달리기 후,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할 때의 그 청량함은 단순하지만 벅찬 기쁨이다. 여름날 택배기사님께 시원한 음료를 건네는 순간은, 세상에 내가 조금은 따뜻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자주 잊거나 준비가 부족한 날이 많지만, 그런 마음을 품는 일 자체가 나에겐 이미 기쁨이다.


대낮부터 맥주나 와인 한 잔 곁들이며 요리를 하거나, 이번 주말을 위한 장볼거리를 상상하다가 잠이 드는 밤도 나름의 즐거움이다. 설거지를 마치고 책을 읽거나, 가보지 못한 여행지를 검색하며 계획을 세우고 무언가를 끄적이는 조용한 시간도 내가 좋아하는 기쁨의 형식이다.


기한을 정하지 않고 하나씩 실천해 가는 버킷리스트는 삶에 작은 방향을 더해준다.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다 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 가슴 가득 차오를 때가 있다.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면, 그 감정을 놓치지 않기 위해 “새삼스럽지만 고맙다”는 짧은 메시지를 보내기도 한다.


별다른 일이 없어도, 아내와 매일 나누는 영상통화, 가끔씩 딸과 주고받는 짧은 카톡은 소소하지만 분명한 즐거움이다. 생각보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들과 나란히 한 잔 나눌 수 있는 날이 오면, 그건 또 얼마나 고맙고 귀한 순간인지.


아주 가끔,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날 뿐만 아니라 문득 스며드는 기쁨으로 충만할 때 나는 하느님께 조용히 기도드린다. 그런 순간들은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나만의 가장 작은 기쁨이자 은밀한 위로다. 꼭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으는 형식이 아니어도 좋다. 달리면서, 걸으면서, 잠들기 전 문득문득 — 그렇게 나는 기쁨의 기도를 드린다.


같이 들으면 좋을 노래 - 해바라기 <소박한 기쁨>

https://youtu.be/QXVYjabqag0?si=_68TllDgetbqr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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