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은퇴를 위한 삶의 자세
직장생활 27년 차 결혼 25년 차 내 나이 이제 51세. 이 정도면 어디를 보나 반환점을 돌아 인생의 후반부로 가고 있는 셈이다. 30년 꽉 채운 후 월급쟁이 생활에서 졸업하는 게 나의 조기은퇴 플랜의 핵심으로, 아직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씩 실행계획을 준비하고 조금씩 실천해나가고 있다. 그런 와중에 올해 초부터 글로벌 재보험사의 일본지점에서 일하게 된 이후 더욱이 내 머릿속에는 ‘조기은퇴’라는 단어가 뚜렷이 자리 잡게 되었다.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준비와 더불어 건강한 생활 습관, 그리고 오라는 사람 없어도 충분히 혼자 놀 수 있는 소일거리들까지 조기은퇴를 위한 필수 항목들의 포트폴리오가 차츰 구축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단신부임해서 혼자 생활하고 있는 50대 아재로서, 고독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견뎌내는 자세야말로 조기은퇴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요즘 들어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또래들보다 일찍 결혼한 덕에 1남1녀인 두 아이는 모두 성인이 되었고, 그중 큰 놈은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올해 초부터 글로벌 컨설팅회사 일본지사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결국 우리 가족은, 동거는 아니지만 아빠와 아들은 도쿄에서 엄마와 딸은 서울의 한 집에서.. 즉 4인가족이 한국과 일본에서 세 집 살림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직장 초년생 시절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까지 한 아내와는 딱히 권태기라는 것을 느껴본 적은 없었지만, 결혼 20년을 넘긴 부부들이 흔히 그렇듯이 엄밀히는 최근 몇 년간 엄청 살갑다고 할 수도 없었다. 십수 년 전 내가 도쿄에서 처음 근무하게 되었을 때는 아내도 휴직을 하고 아직 어렸던 아이들과 함께 왔었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이 다 큰 탓도 있고 본인 스스로 나처럼 몇 년 더 일하고 명퇴를 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었기에 결국 나만 홀로 오게 되었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우리 부부는 어느 정도 혼자만의 시간을 중시하는 성향이 있기에, 결혼 25년을 앞둔 부부로서 적당하 떨어져서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원래부터 아내가 없어도 혼자 알아서 밥을 챙겨 먹는 데 익숙하고 집안 일도 그럭저럭 해 왔다(고 생각했기에), 비록 혼자 생활해도 어느 정도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역시 50대에 접어든 아재로서 아내의 부재는 컸다. 내가 사는 맨션은 일본의 1인 가구들이 다 그렇듯이 채 10평이 안 되는 작은 사이즈지만, 처음 집을 구하고 정착하기까지 온전히 나 스스로 해결하기에는 모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필요 물품들 갖추고 조립하고 설치하고 쓸고 닦고 버리는 일들 외에도, 외식은 최소화하고 가급적 집밥을 만들어 먹으려 하다 보니 장을 보고 음식 재료를 손질하거나 관리하는 일에서 요리까지 알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인터넷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아내에게 전화로. 물어보다 보니 하루에 최소 한번 이상은 통화를 하게 되고, 이제는 많은 것들이 적응이 되었지만 여전히 매일 페이스톡 통화를 하고 있다. 조금 과장하면 연애하던 시절로 돌아간 듯 이제는 매일 아내랑 통화하는 게 기다려진다. 서로가 엄청 수다를 떠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그날 있었던 일들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기보다 그냥 얼굴 보며 잘 지냈는지 확인하는 정도이지만 , 도쿄에서 홀로 생활하고 있는 나에겐 회사생활에 집중하고 나 자신을 소중히 여기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역시 혼자 사는 아들과는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식사나 술 한잔씩 하고 있고, 아내와 통화할 때 가끔은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딸도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다. 물론, 1년에 두어 번은 나도 나가겠지만 방학에는 아내와 딸이 또 도쿄로 올 예정이다. 모두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가족의 유대감을 잃지 않으며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를 응원하며 열심히 살고 있다는 안심감이 들기에는 충분하다. 결국 나는 고독하지만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요즘 들어 많이 하게 된다.
예전에 읽은 마루야마겐지(丸山健二)의 에세이 이후 나는 오랫동안 ‘자유로운 고독’을 동경해 왔다. 어찌 보면 지금 내가 나이 50 넘어 도쿄로 단신부임한 이유 중 하나도 이러한 자유로운 고독을 찾아서였는지도 모른다. 다만, 고립이나 도피가 아닌 고독한 삶을 스스로 선택해서 살 수 있는 것도 내가 사랑하고 의지하고 지켜주고 싶은 가족이 있기에 가능한 게 아닌가 싶다. 조기은퇴를 꿈꾸고 준비를 시작하며 몇 년 전부터 공허한 단톡방을 하나씩 탈퇴해 왔고 물리적으로 외국에 나와서 생활하다 보니 또한 일정 부분 필요에 의해 유지되던 인간관계도 많이 정리가 된 것 같다. 일본의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듯이, 회사에서는 도시락 등으로 혼밥 할 때가 많고 퇴근후나 주말에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약속을 거의 안 잡고 혼자서 먹고 즐길 때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다는 느낌은 거의 없다. 조기 은퇴를 위해 남은 3-4년 정도 아직 계획하고 대비할 일들이 많이 있지만, 적어도 고독을 즐기되 외롭지 않게 살 자신은 있다. 이러한 내 자신감은, 매일을 충실하게 하루를 살 수 있도록 나를 지탱해 주는 가족과,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가끔씩 서울에서 찾아오는 친구나 지인이 있기에 가능한 게 아닌 가 싶다. 또한 무엇보다 운동 / 독서 / 공부 / 요리 등 나만의 소소한 루틴들을 하나씩 실천하다 보면 솔직히 외로워할 틈조차 없다.
때로는 고독하겠지만, 나 스스로를 위해 그리고 가족을 생각하며 이번 한 주도 남은 2023년도 하루하루 더욱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한다. 조기은퇴를 실현하기 위해 어쩌면 은퇴 이후에도 이러한 내 삶의 방식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