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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기노 May 12. 2024

막걸리와 섞박지

한 번씩 서울 나올 때마다 내가 찾는 것들

그래봤자 도어투도어로 4시간 남짓이다. 도쿄 거처에서 서울의 내 집까지는 그만큼 가깝다.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금방 올 수 있다 보니 '한국 나온다'는 표현조차 조금 간지럽다. 요즘은 3-4개월에 한 번 정도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몇 년 만에 이역만리에서 한국방문하는 동포도 아니고, 서울에 나온다고 해서 특별히 무언가를 찾지는 않는다. 그저 아내와 있는 반찬에 집밥 먹고 한강에서 운동하고 동네 시장이나 마트에 가고, 주말엔 예전부터 좋아하던 서울숲이나 여기저기 성곽길, 둘레길을 걷고 어딘가 맛집을 찾아다니는 정도.


나이 50 넘어 시작한 단심부임 도쿄생활 2년 차. 이제는 웬만한 한국 음식은 직접 만들어 먹을 정도의 요리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김치찜, 제육볶음, 북엇국, 소고기뭇국 등은 이제 레시피 보지 않고도 뚝딱 만들 수 있다. 집에서 만들어 먹기 쉽지 않은 한국 음식은 회사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아카사카(赤坂)에 가서 먹고 오기도 한다. 편의점 어디를 가도 신라면과 참이슬이 놓여있기에 타국에서 최소한의 홀아비 생활을 위한 기본이 갖춰져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서울 나올 때면 꼭 찾게 되는 음식들이 있다.


가장 먼저는 생막걸리이다. 일본에도 슈퍼나 편의점에 한국 막걸리가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캔에 들어 유통기한이 긴 놈들이다. 내 입맛 기준으로 유통기한이 길다는 것은 맛이 없다는 얘기다. 간혹 대형슈퍼 냉장고에 G브랜드의 생막걸리가 놓여있기도 한데, 물론 없는 것보다는 낫지만 이 놈도 유통기한이 꽤 되다 보니 한국에서보다 3배 가까이 비싼 가격에도 조금 아쉬운 맛이다. 내가 좋아하는 S브랜드의 생막걸리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없다.


그러다 보니 서울에 한 번씩 나올 때면, 주 3일 지키려고 노력하는 휴간일(休肝日)아 아닌 한 어떤 음식을 먹든 저녁에 막걸리 한통 곁들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굳이 보쌈이나 전과 같은 막걸리의 막역한 친구가 없어도 상관없다. 김치나 나물, 멸치볶음 등 그저 있는 반찬이면 충분하다. 특유의 톡 쏘는 청량감으로 인해 매운 음식과도 다 어울리는 편이다. 도수는 맥주와 비슷한 대신 한 통의 용량이 750ml이나 되다 보니, 맥주 2캔째 딸 때의 죄책감 같은 걸 느낄 필요도 없다. 불과 몇 년 전에 비해 50% 가까이 올랐다지만 편의점에서 사도 여전히 1600원 정도로 가성비 최강이다. 좀 과장될지 모르지만, 일본보다 한국에서 사는 게 더 좋은 이유들을 꼽자면 아마도 생막걸리를 부담 없는 가격에 어디서나 손쉽게 마실 수 있다는 점도 포함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몇 달에 한 번씩 서울에 나올 때면, 생막걸리만큼이나 별 것 아닌데도 꼭 먹고 싶은 음식이 또 있으니 그건 바로 적당히 신맛이 들은 달짝지근한 섞박지이다. 외식이라도 한번 할라치면 곰탕이나 감자탕 등 대체로 섞박지가 딸려 나오는 음식점만 가려한다고 아내가 볼멘소리를 할 정도이다. 예전에는 섞박지를 그렇게 즐기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포장이나 배달 주문을 할 때면 처음부터 ”섞박지는 빼고 주셔도 돼요”라고 요청하는 적도 많았다.


혼자서 생활하다 보니 기본적으로 냉장 보관이 필요한 음식이나 식자재 외에, 몇 달에 한 번씩 아내가 보내주는 배추김치 만으로도 냉장고 수납공간이 빠듯하다. 일본에 가기 전에 직점 깍두기도 담가 보고 나름 혼자살이 준비를 했지만, 부득이하게 미니멀한 삶을 추구하다 보니 배추김치 하나로 만족하며 살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야 집에서든 밖의 음식점 어딜 가든 배추김치 외에도 최소한 하나 정도 다른 김치류가 상차림에 포함될 때가 많지만, 좁은 집에 사는 외국의 자취생에겐 사치나 다름없다. 게다가 일본 내 한국 음식점 어디를 가도 기본 반찬에 섞박지가 딸려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다 보니, 예전에 박대까지 했던 이 녀석이 어느덧 그리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옛 문헌에 의하면, 사실 섞박지는 무와 배추 외에도 오이, 가지, 미나리, 갓 등 다양한 채소에 때로는 낙지 등 신선한 해산물도 섞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요즘 음식점에서 보는 섞박지는 원래의 정의에서 조금 변질되어 무를 얇고 넓게 썰어서 담근 것을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의미에서는 깍두기와 큰 차이가 없이 통용되고 있다. 매일 반찬으로 먹기에는 단맛이 좀 강해서 아주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식당에서 본격적으로 탕이 끓거나 나오기 전에 막걸리 한잔 하기에 이만한 안주가 없다. 섞박지 큼지막한 놈 하나면 막걸리 두 사발까지도 마실 수 있다. 식전주로 막걸리만 한 술이 없고, 그런 최고의 식전주를 받쳐주는 최상의 안주로 또한 섞박지에 대적할 놈이 별로 없다. 별것 아닌 이 조합을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어제 오후에는 한강을 기분 좋게 달린 후 집에 오는 길에 순댓국을 포장해 왔다. 기분 좋게 운동하고 샤워까지 하고 난 후, 약한 불로 순댓국을 데우면서 미리 사다 놓은 막걸리를 김치냉장고에서 꺼내 포장에 포함되어 온 섞박지에 한 잔 했다. 서울에 나와 있는 짧은 기간 동안 몇 번씩 반복하는 이 소박한 '섞박지 곁들인 막걸리 한통 의식'을 하다 보면 어느덧 만감이 교차한다.


땀을 흘리고 난 후의 뿌듯함, 오늘도 나름 잘 살았다는 충실함,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30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잘 해내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대견함, 멀지는 않지만 나이 50 넘어 타국에서 홀로 생활하는 삶의 고단함, 점점 더 노쇄해가는 홀어머니에 대한 걱정과 연민의 마음,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는 몇 안 되는 친구와 지인이 있다는 새삼스런 고마움,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다시 고개를 드는 미래에 대한 약간의 불안과 걱정, 동시에 은퇴 후 삶에 대한 기대와 설렘 등등. 내 마음은 언제나 복잡다단하다.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때로는 내 뜻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사, 자뻑과도 같이 무한한 자기만족과 긍정이 팽배하는 순간들, 좋든 싫든 그로 인한 마음의 부침(浮沈)들. 그럴 때마다 막걸리와 섞박지는 나에게 가만히 속삭이는 것 같다.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오늘처럼 앞으로도 지금 여기 이 순간들에 충실하고 그저 단순하게 살면 돼~~


이 순간만은 막걸리 몇 잔에 섞박지가 내 삶의 길잡이가 된다. 무엇보다 이 소박한 먹거리에 세상 시름 잠시 잊고 행복해하는 나 자신을 경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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