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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기노 Aug 03. 2024

후지산(富士山) 정상에선 라면을 끓여서 팔고 있었다

일본 100 명산 네 번째 등정기

후지산의 높이는 3776미터로 대한민국 최고봉인 한라산의 거의 2배 높이이다. 여느 일본인들처럼 후지산을 딱히 신성시할 마음은 없지만, 이 정도 높이의 산에 올라보고 싶은 마음이 늘 있었다. 6년 전인 2018년 여름에도 휴가를 내고 서울에서 날아와 도전을 한 바 있지만, 중간에 날씨가 급변하는 바람에 진행하는 분들에 의해 중간에서 제지를 당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그만큼 후지산은 날씨의 도움 없이는 정상까지 가기 어려운 산이다. 여하튼 몇 달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차곡차곡 준비를 해서 후지산 등정에 다시 도전하게 되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우선은 가와구치코(河口湖)역 근처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 이른 아침 가장 일반적인 등산 시작점인 후지산고고메(五合目)로 가기로 했다.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내고 신주쿠발 버스에 몸을 싣고 6년 만에 가와구치코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4시 30분 정도였다.


역 근처 숙소에 체크인을 한 후, 후지산 등정을 동행하기로 한 일본인 친구와 만나기로 한 6시 정도까지 가와구치 호수를 둘러보았다. 6년 전에는 산행 하루 전에 날씨가 좋아 왠지 더 설렜던 기억인데, 이번엔 날이 꾸물해서 불안했다. 다행히 등산 당일인 토요일 오후 4시까지 강수 확률이 낮다는  일기예보에 기대를 걸어 볼 수밖에 없었다. 호수 주변은 고요하고 평화로웠고, 평일 오후에 휴가를 내고 여유룰 만끽하며 산책을 즐기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토요일 아침 가와구치코역에서 6시 30분에 출발하는 후지산고고메행 버스를 타고 해발 2304미터인 고고메에 내리니 대략 7시 20분 정도였다. 버스 타기 전에 아침끼니 포함해서 오니기리 3개 물 550ml 두 병, 간단한 행동식 등을 구입하고 왔기에 고고메에서는 화장실 들러 복장 정비하고 바로 출발했다. 걱정과는 달리 날씨가 좋아서 기분이 한껏 고양되었다. 올해부터 고고메서 출발하는 요시다루트의 경우 사전에 후지산 등반에 대한 유료 예약이 필요해서 그런지 외국인의 비중은 증가한 것처럼 보였으나 전체 산행객은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었다.


고고메 매점에서 판매하는 욱일기 깃발을 단 막대기를 들고 자랑처럼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을 보며 역사에 대한 그들의 무신경함에 약간 화가 났다. 백번양보해서 서양인은 그렇다 쳐도 어찌 보면 일본 침략의 직접적인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중국권 및 동남아 국가 여행객들은 어찌 이렇게 무지할 수 있을지 참 어이가 없었다.


출발 후 평탄한 길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 이제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달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챙 넓은 등산모자를 고쳐 쓰고, 언제나처럼 나의 호흡에 집중하며 발밑을 보며 천천히 걸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은 땀이 엄청날 정도는 아니었으나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이 꽤 따가웠다.

흙길에서 돌산으로 바뀌고 조금씩 경사도 급해지기 시작했다. 보통은 산행 시 팟캐스트를 듣곤 하지만 이날은 핸드폰 배터리를 조금이라도 아끼려다 보니 오히려 온전히 산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생각을 덜어내고 또 생각을 정리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소리 없이 나와 대화를 하며 그렇게 고도를 계속 높여나갔다. 저 멀리 보이는 산장이 나중에 알고 보니 나나고메(七合目) 지점이었다. 아직까지는 호흡도 체력도 전혀 어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순간이 참 다행이고 고맙게 느껴졌다.

비록 비가 올 조짐은 없었지만 후지산 날씨가 워낙 변덕이 심하다는 말을 익히 들어왔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완전히 쾌청한 날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이렇게 멋진 운해를 볼 수도 있었다. 나나고메부터는 정말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걸을 때는 몰랐는데, 산장에서 잠깐 등산배낭 내려놓고 쉬다 보니 이제 슬슬 쌀쌀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혹시 몰라 바람막이를 여름용과 가을용 두 개나 가지고 왔는데, 아직까지 꺼내 입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치고메(八合目)부터는 여름용 바람막이가 필요했다. 어느덧 3200미터를 넘고 보니 확실히 산소가 부족한 게 느껴졌다. 아직까지 크게 힘들지는 않았으나, 언제나처럼 산에서는 욕심과 방심은 금물이기에 더욱 조심하며 남은 500여 미터 높이를 올라갔다. 다행히 정상까지 가는 중에 고산증 증세는 없었으나 마지막 1시간은 슬로모션처럼 모든 게 느려졌다.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 지금까지 내 인생의 무게가 느껴진 것은 조금 과장이었을까? 정상까지 불과 몇 미터를 남겨두고는 문득 며칠 전 작고한 김민기 선생의 숭고한 명곡 ‘아침이슬’이 떠올랐다.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그렇게 정상에 도착했다. 감사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커리어 상으로는 이제 더 이상 크게 더 오를 일이 없지만, 일본 최고봉인 후지산 정상은 내게도 기회를 주었고 나는 마침내 정상에 서게 된 것이다. 한국의 100대 명산 등정을 끝내고 기약 없는 일본의 100 명산 도전을 시작한 이후 네 번째 산이다.

어느덧 하늘엔 구름이 많아졌고 이따금 천둥도 치고 있었다. 즉, 머지않아 비가 올 수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달랑 하나 남은 오니기리만으로는 배가 찰 것 같지 않아, 컵라면을 사려 매점에 가니 컵라면 1000엔, 끓인 라면 1200엔에 팔고 있었다. 상술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면 당연히 끓인 라면을 먹을 수밖에. 주문 후 5분 만에 나온 라면은 인스턴트 봉지면에 차슈와 미역 등을 올린 수준이었지만, 정상에 오른 성취감에 그리고 손끝이 살짝 시린 기온에 어울리는 따뜻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배부르게 먹고 나서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하산을 하기 시작했다. 자갈 섞인 모래사막을 미끄러지듯이 내려왔다. 스틱에 의지하여 무릎에 무리를 최소화하며 3시간 정도만에 고고메로 돌아오게 되었다. 거의 다 내려오니 당초 일기예보대로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상태에서 내리던 시원한 여름비가 어찌나 반갑던지. 다시 가와구치코역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정류장에 내리니 신주쿠로 돌아가기 위한 버스 시간까지 1시간 반이상 남아 있었다. 역 앞의 한 호텔에서 운영하는 목욕탕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맥주 한잔 곁들여 저녁을 먹고 나오니 터질 것 같은 붉은 노을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도쿄에서 좀처럼 이런 멋진 노을 보기 힘든데, 오늘은 여러모로 완벽한 날이었다. 다치지 않고 무사히 하산한 고마움, 살아있다는 기쁨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으로 충만한 하루였다.


들을 때마다 가슴 먹먹해지는 <아름다운 사람>  그리고 그 웅장하면서도 고요한 울림에 늘 가슴 벅차오르는 <아침 이슬>이라는 역사에 남을 명목들을 남겨 주신 故김민기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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