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2023년 가을
서울은 오늘 체감온도 영하 10도라는데, 도쿄는 그야말로 만추(晩秋)를 맞아 본격적인 단풍시즌에 돌입했다. 사계절 중 가장 역동적인 적적(寂寂)함을 선사하는 지금의 늦가을은 계절의 변화만큼이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실 나는 만추의 쓸쓸함을 좋아한다. 이맘때 느끼는 뜻 모를 고립감과 지난 한 해에 대한 반추의 과정은, 곧 닥쳐올 겨울 그리고 이어지는 새로운 한 해에 대한 힘찬 출발을 위한 자양분이 되곤 한다. 이때가 되면 나는 뻥 뚫린 마음의 공백을 메우며 여백 있는 고독을 곱씹기 위한 나만의 의식으로 평소 좋아하는 하아쿠(俳句)를 다시 꺼내 읽곤 한다.
지금까지 50년을 살며 늘 뭔가를 채우기 위해 넘치는 욕망으로 살아왔다. 삶의 반환점을 돌고 조금 이른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입장에서 하이쿠라는 이 짧은 시에 담겨 있는 다양한 우리네 마음들, 특히 인생의 덧없음,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자연과 세상에 대한 관조의 자세는 때로는 적막한 마음에 위로를 주며 또 얼마간 일상의 힘듦을 견디게 해 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 만추에 어울릴만한 내가 좋아하는 몇 편의 하이쿠를 뽑아 봤다. 누군가의 글에 대해 평론을 할 능력은 전혀 안되지만, 각각의 하이쿠에 대한 내 느낌을 짧게 덧붙여 봤다.
(일상의 기록차원에서 브런치에 남기는 이 보잘것없는 글은, 시인이자 여행가, 에세이스트이신 류시화 님이 깊이 있고 때로는 마음을 울리는 해설을 곁들여 집대성한 <백만 광년의 고독 속에서 한 줄의 시를 읽다>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작성되었음을 밝혀둔다)
평생을 방랑시인으로 살았던 마쓰오바쇼(松尾芭蕉)의 이 짧은 시 두 편에는 그야말로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나지만 그럼에도 결코 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외로움을 물으러
오지 않겠나
오동잎 한 잎
さびしさを問てくれぬか桐一葉
- 바쇼(芭蕉)
이 길
오가는 사람 없이
저무는 가을
此の道や行く人なしに秋の暮
- 바쇼(芭蕉)
외로움은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처하게 되는 감정이지만, 고독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글이 생각난다. 외롭기보다 적당히 행복한 고독을 느끼는 삶을 위하여!
외로움에도
즐거움이 있어라
저무는 가을
淋しさの嬉しくもあり秋の暮
- 부손(蕪村)
서른다섯의 나이에 짧은 생을 마감한 마사오카시키(正岡子規). 평생 병약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여백미 있는 시를 썼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떠나는 내게
머무는 그대에게
가을이 두 개
行く我にとどまる汝に秋二つ
- 시키(子規)
내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시키의 하이쿠. 그리운 이를 떠나보낸 후 소리 죽여 우는 설움이 느껴져 처음 이 하이쿠를 접했을 때는 울컥했다. 그 옛날 외갓집 모기장이 그립기도.
그대를 보내고
생각나는 일 있어
모기장 안에서 운다
君を送りて思ふことあり蚊帳に泣く
- 시키(子規)
‘바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문학이나 노래 제목이 많다. 그만큼 바람은 우리에게 많은 위로와 가르침을 주는 듯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도 어찌 보면 바람의 힘이 아닐까.
바람에게 물으라
어느 것이 먼저 지는지
나뭇잎 중에
風に聞けいずれか先に散る木の葉
- 소세키(漱石)
못내 아쉬운 늦가을밤 휘영청 달빛 아래서, 곁에 있어도 늘 그리운 사람과 함께 가벼운 입김 불어가며 소박한 안주 곁들여 술잔 기울이며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밤.
그가 한마디
내가 한마디
가을은 깊어 가고
彼一語我一語秋深みかも
- 교시 (虚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