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스, 스토너
인생이 원코인 게임과 다름없다는 걸 알고부터 나는 습관적으로 나를 의심한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는지,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끊임없이 살펴보고 곱씹는다. 틀린 선택 하나가 인생 전체를 구렁텅이로 빠트릴 수 있다는 불안감이 삶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뭐 하나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이 순간순간 삶을 옭아맨다.
하물며 우리에겐 삶의 모든 것이 처음이다. 굳이 ‘처음’자를 붙이지 않는 것들마저 우리에겐 모두 다 처음이다. 수많은 날들을 지내며 나이를 먹어왔어도, 이 나이 들어 맞이하는 오늘은 매일이 처음이다. 처음일 수밖에 없다. 2016년 5월의 오늘은 죽었다 깨어나도 다시 오지 않고 전에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모든 선택이 조심스럽다.
한번쯤 Ctrl+Z라도 누를 수 있다면 좀 더 쉬워지련만, 인생엔 삼세판도 시범경기도 없이 처음 한판이 모든 걸 결정한다.
때문에 처음 제 발로 서는 아이처럼 모든 선택이 불안하고 순간순간 흔들린다. 인생은 언제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위태로운 걸음걸이를 닮았다. 밤거리를 헤매는 주정뱅이의 비틀거림을 닮았다. 당사자에게 힘든 인생일수록 그리는 궤적은 종잡을 수 없다. 가까이서 보면 슬픈 삶일수록 멀리서 보면 우스운 건 그 때문이다.
존 윌리엄스가 쓴 <스토너>의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의 궤적도 마찬가지다.
가난한 집안, 미친 아내, 사내 불륜, 알코올중독자 딸, 승진 누락, 암. 스토너의 인생은 성공이나 명성이라 부를만한 성취 하나 없이 조용히 시작돼 조용히 끝난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영문학 교수가 됐다는 게 성취라면 성취일 수 있겠으나 그마저 조교수 이상 올라가지 못한다.
딸과의 교감, 뒤늦게 깨달은 사랑, 교육과 연구에 대한 열정 등 스토너가 발견한 소중한 것은 모두 오래가지 못한다. 정점에 달한 순간 훼방 받고 결국 제 손을 떠난다. 할 수 있는 것도 딱히 없다. 스토너에게 인생이란 살아나가기 보다는 받아들이는 쪽에 가깝다. 제 삶이지만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스토너의 동료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도 그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의 이름을 잘 입에 올리지 않는다. 노장교수들에게 스토너의 이름은 그들을 기다리는 종말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하고, 젊은 교수들에게는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일깨워주지 않고 동질감을 느낄 구석도 전혀 없는 단순한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스포트라이트 안에 있어도 주목 받지 못할 것 같은 사내의 주연보다는 조연에 가까운 삶. 스토너의 삶을 걸음걸이에 비유하면, 정처 없는 산책 정도가 될 것이다. 방향성도 목적성도 없이 그저 걷기 위해 걷는, 어디 멀리 나가지도 못하고 집 언저리만 맴돈. 그의 눈은 발밑을 향하겠지. 들여다보면 그 안엔 슬픔도 분노도 행복도 있지만, 겉에서 볼 땐 별다른 특이점 하나 없이 참 잔잔한 인생이다.
스토너에게 단 하나 특별한 점이 있다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짧은 인생을 비관하거나 낙관하지 않고 다만 관조했다는 것이다. 스토너는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겠다는 소박한 원칙에 시선을 두고, 주위 모든 것을 담담히 바라본다.
죽는 순간에도 다르지 않다. 다음 생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마냥, 스토너는 조용하고도 서서하게 온몸이 멈추는 느낌을 그저 느낀다.
들숨과 함께 자신의 안쪽 깊숙한 곳 어딘가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움직임은 뭔가를 멈추게 하고, 그의 머리를 움직일 수 없게 고정해 버렸다 하지만 이내 그 느낌이 사라졌다. 그는 생각했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서야 내 삶은 온전히 내 것이 된다. 가진 힘 이상으로 애쓰고 아등바등 발버둥 쳐 봐야 인생은 원래의 속도와 모양으로 흘러갈 뿐이다. 별 볼일 없는 제 삶을 있는 그대로, 끝까지 끌어안은 스토너. 작은 바람에도 요란하게 흔들리는 인생들에게 <스토너>가 주목받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