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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금 Oct 19. 2017

엄마에 대하여

김혜진, 딸에 대하여

엄마에게 자식이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사사건건이라 해도 모자라지 않을 만큼 나는 모든 결정에서 엄마와 반목했다. 그건 엄마에게 내가 엄마와 다른 사람임을 확인시키는 과정이었다. 엄마와 다른 가치관, 그러니까 엄마 밖의 세계에서 배운 것들이 늘상 문제가 됐다. 엄마는 늘 나의 행복을 바랐지만 그 행복이 내가 바라는 행복은 아니었다.


때문에 원망할 무언가가 필요할 때마다 엄마가 손에 닿았다. 늘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기에 쉬운 선택이었다. 엄마가 해주지 않은 것과 해주지 못한 것, 엄마가 동의한 것과 반대한 것, 엄마가 보태온 걱정과 덜어간 고민, 엄마가 부풀린 희망과 잠재운 불안까지. 원망할 처지가 되기까지 지나온 여정 곳곳에 엄마의 흔적이 남았다. 나는 이렇게 된 데 대한 책임과 이렇게 된 데 따른 좌절을 엄마의 그릇에 덜어내며 커왔다. 그리고 엄마는 기꺼이 내 잔해를 거뒀다.


어쩌면 엄마에게 자식이란 자신이 낳았을 뿐 완전히 다른 존재, 그런데도 완전히 이해하거나 포용하기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닐까.


김혜진이 쓴 <딸에 대하여>에도 꼭 그런 엄마가 나온다.


요양원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60대 엄마와 대학 강사로 일하는 30대 딸. 번듯한 사윗감 하나 데려와 평범한 가정을 이뤘으면 하는 엄마의 바람과 달리 딸은 7년간 여자와 동거하더니 급기야 집으로 데려온다. 엄마는 불안하지만 딸의 튀는 행동은 그게 끝이 아니다. 딸은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부당 해고당한 동료를 위해 대학 측에 맞선다.


딸애는 내 삶 속에서 생겨났다. 내 삶 속에서 태어나서 한동안은 조건 없는 호의와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존재. 그러나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 굴고 있다. 저 혼자 태어나서 저 스스로 자라고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딸은 돈이 없고, 시위하느라 얼굴에 상처를 달고 들어오며, 여자와 한 침대에 눕는다. 엄마 눈에는 딸이 아직 너무 순진하고 딸 눈에는 엄마가 여전히 너무 갑갑하다.


엄마가 세상의 전부라고 알던 아이. 내 말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며 성장한 아이. 아니다, 하면 아니라고 이해하고 옳다, 하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던 아이. 잘못했다고 말하고 금세 내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던 아이. 이제 아이는 나를 앞지르고 저만큼 가 버렸다. 이제는 회초리를 들고 아무리 엄한 얼굴을 해 봐도 소용이 없다. 딸애의 세계는 나로부터 너무 멀다. 딸애는 다시 내 품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내버려 두는 대신 딸의 세계로 뛰어든다. 딸이 시위하는 장소에 찾아가고, 딸의 동료를 문병하고, 딸의 애인과 밥을 먹는다. 그렇게 딸의 세계를 체감하고 제 안에서 딸의 모습을 찾아 끄집어낸다. 딸과 닮아간다.


다시 엄마에게 자식이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요즘 엄마는 내가 읽는 책들을 따라 읽는다. ‘어렵다’는 둥 ‘너무 어둡다’는 둥 불평이 따라붙지만, 내 책들은 내 방 책장에서 엄마 화장대로, 식탁으로, 소파로, 마지막에는 엄마 방 책장으로 부지런히 옮겨 다닌다. 그렇게 엄마는 저를 닮은 나를 닮아간다. 내가 가장 아끼는 책엔 엄마가 오래전 그어둔 밑줄이 가득하다는 걸 엄마는 알까.


<딸에 대하여>는 실은 엄마에 대한 책이다. 자신이 낳은 작은 세계에 가닿기 위한 엄마의 노력에 대한 책이다.


운 좋게도 책 속 엄마와 비슷한 엄마를 가진 딸은 책을 통해 엄마도 하나의 개인임을 새삼 깨닫는다. 그리고 다짐한다. 이번에는 내가 한 발짝, 엄마의 세계로 다가가 보자고.


이런 대화를 밤새 나누면 우리가 어떤 접점에 이르게 될까. 나도 동의하고 딸애도 동의하는 어떤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럴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럴 수만 있다면 포기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다.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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