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쓰다 시리즈 1/5
“집은 새로운 세대의 변혁과 새로운 인간의 요구를 부단히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여유를 지니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오래오래 애정이 깃든 집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다.” 김수근,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다>에서
빨간 벽돌과 담쟁이덩굴로 기억되는 김수근 건축은 전통과 근대성의 합일이었다. 김수근이 지닌 안목과 신념, 탁월한 미의식, 근사한 삶의 모습은 젊은 날의 승효상을 사로잡았다. 승효상에게 스승 김수근은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이었다.
김수근은 1959년 남산 국회의사당 설계공모에 29세 나이로 일등 당선했다. 서울대 건축과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 지 8년 만의 일이었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이 일어나면서 설계안은 폐기되지만, 당선을 계기로 귀국해 건축 사무소를 열고 본격적인 국내 활동에 나선다.
1961년 초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미군 위락 시설을 확보하기 위해 워커힐 호텔 건립을 추진한다. 설계위원의 일원이던 김수근은 워커힐 힐탑바(현 피자힐)를 맡아 국내 최초 노출 콘크리트 공법을 선보인다. 이때 김수근을 눈여겨본 김종필은 1964년 자유센터(현 남산제이그랜하우스) 설계를 그에게 맡긴다. 내처 1968년에는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사장 자리에 김수근을 앉힌다.
국토 개발을 주도하게 된 김수근은 동경예대 시절 접한 근대적인 도시 계획 개념을 여의도와 남대문시장, 세운상가 개발 등에 적용한다. 30대 초반에 대형 국가 프로젝트를 도맡았지만 김수근 고유의 건축 언어는 아직 정립되지 않은 채다. 이 시기의 김수근은 스승 요시무라 준조와 단게 겐조, 르코르뷔지에의 건축을 부분 모방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967년 김수근 건축은 전환점을 맞는다. 한 일간지가 김수근이 설계한 부여박물관의 정문과 지붕모양이 일본 신사와 유사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한국 건축을 대표하던 김중업도 일본식 건축이 틀림없다고 거들었다. 김수근은 ‘백제도 일본도 아닌 김수근의 양식’이라고 응수했지만 종국에는 설계 변경을 수용한다.
부여박물관 왜색 논란을 계기로 김수근은 한국 건축의 독자성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1969년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 대표직을 사임한 뒤 미술사학자 최순우와 함께 전국의 학옥과 초가, 사찰을 누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로 잘 알려진 최순우는 젊은 건축가에게 한국의 미를 가르치지 않았다. 다만 넌지시 보여 주었다. 인간 중심의 공간을 강조하는 김수근의 건축 철학이 이 무렵에 구축된다. 1970년대부터 김수근은 전통 가옥의 인간적 규모를 현대 건축에 적용한다. 원서동 공간사옥, 샘터 사옥, 경동교회, 양덕성당, 청주박물관, 진주박물관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1971년 착공해 1977년 준공한 공간 사옥은 김수근 작품의 백미로 꼽힌다. 공간사옥에는 김수근 특유의 중첩되고 비틀리는 공간 미학이 그대로 살아 있다. 김수근은 층마다 층고를 달리하고, 반 층마다 공간을 구획하는 스킵 플로어(skip floor) 방식을 적용해 공간 사옥 내부를 작은 단위 공간들로 나눴다. 자연히 기존 공간의 정의가 무너졌다. 대신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매개 공간에 연속성과 장소성이 생겼다. 중첩된 공간이 만들어 낸 새로운 흐름이다. 둘러싸여 있으나 결코 막히지 않은 공간(enclosed but endless space). 김수근은 공간 사옥을 이렇게 정의했다. 김수근의 이러한 공간 개념은 추후 필요 이상의 공간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적정 공간’, 공간의 안팎이 이용될 수 있는 ‘통합 공간’, 구조적 가변성과 유연성이 있는 ‘자궁 공간’ 등으로 발전한다.
김수근은 건축뿐 아니라 문화와 예술 전반을 아우르는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1977년 미국 『타임』지는 김수근을 ‘서울의 로렌초’라고 소개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 후원가였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등을 후원했다. 김수근은 1966년 11월 예술·건축 종합 잡지 『공간』을 창간해 한국 문화 및 예술 활동 전반을 기록했다. 공간 사옥 지하에는 소극장과 화랑을 마련했다. 김덕수 사물놀이, ‘병신춤’의 공옥진 등이 이곳에서 이름을 알렸다. 김덕수는 “시대의 억압에 눌려 숨도 못 쉬던 수많은 전통 예술이 공간에서 태어났다”고 말한다.
다만 1976년 완공된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보호센터)은 김수근의 오점으로 남아있다. 대공분실은 설계 시점부터 인간의 공포를 극대화하려 했다는 의심을 받는다. 설계를 의뢰한 군사 정권의 강압이었는지, 설계자의 자발적 굴종이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김수근은 생전 자신의 작품 목록에서 대공분실을 제외했으며, 이 건물을 자신이 설계했다고 명시하기를 꺼렸다.
1986년 6월 14일 김수근은 55세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 건축가로서의 경험과 기량, 건축 철학이 완숙기에 접어든 때다. 장례식이 치러진 서울대학교병원 주변은 전 세계에서 몰려든 수만 명의 조문객으로 마비됐고 조의금만 2억 원이 들어왔다. 여기에 후학들이 보탠 2억 원이 더해져 김수근문화재단이 설립되었다. 재단은 1990년을 한국 문화예술 지원을 위해 김수근문화상을 제정, 시상하고 있다. “후학들의 가슴에 내 이름이 살아 있다면 난 죽은 게 아니다.” 김수근의 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