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쓰다 시리즈 2/5
“건축은 인간에의 찬가입니다. 알뜰한 자연 속에서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쳐진 또 하나의 자연입니다. 인간이 빚어 놓은 엄청난 손짓이며 또한 귀한 사인입니다. 참다운 건축이란 인간에게 짜릿한 감동을 주어 끝없는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드라마를 연출합니다.” 김중업, <건축가의 빛과 그림자>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건축예술계의 두 계보는 김수근과 김중업으로부터 시작됐다. 서구 근대건축과 한국 전통건축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에 대해 두 사람이 내놓은 서로 다른 답이 한국 건축의 주춧돌이 됐다. 김수근이 한국적 공간과 재료에 몰두했다면, 김중업은 한국적 형태와 구조에 천착했다.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로 대표되는 서구 근대건축을 한국에 선보였다. 김중업이 처음 르코르뷔지에를 만난 건 1952년 9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열린 ‘제1회 국제 예술가회의’에서다. 동경하던 건축가를 만난 29살의 청년은 서툰 영어로 다짜고짜 배움을 청한다. 르코르뷔지에는 프랑스 파리의 개인사무실까지 찾아온 김중업에게 2주를 주고는 인도 찬디가르의 행정청사 옥상정원 설계를 시킨다. 얼마나 하는지 어디 한번 보자는 시험이었다. 김중업은 태극문양 정원으로 낮은 기대를 깨고 르코르뷔지에 문하에 들어간다. 서울대학교 교수직을 버린 대신 건축 인생의 빛을 만난 셈이다.
1952년 10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약 3년 동안 김중업은 르코르뷔지에의 설계도를 베끼고 또 베낀다. 머릿속엔 하루빨리 르코르뷔지에를 자기화하고 귀국해야겠다는 일념뿐이었다. 한국에 부인과 자식이 있었다. 마침내 1956년 2월 김중업은 스승의 만류를 뒤로하고 귀국한다. 김중업 건축 세계의 본격적인 시작이다. 그해 3월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문을 연 김중업 건축연구에서 서강대학교 본관, 주한 프랑스대사관, 제주대학교 본관, 한국미술관 등 김중업 대표작 대부분이 탄생했다.
김중업의 건축 세계는 지붕으로 압축된다. 김중업의 지붕은 하늘을 향해 날렵하게 뻗어 올라가며 강렬한 힘을 뿜어낸다. 그런데도 무게감 없이 사뿐하다. 자연히 아래를 바라보며 덮어주는 지붕 원래의 기능보다는 하늘과 만나는 건축물 상단으로써의 의미가 더 강조된다. 김중업에게 지붕은 하늘에 바치는 뜨거운 찬가다.
이 같은 지붕표현은 1958년 완공된 서강대학교 본관에서부터 나타난다. 서강대 본관 업무동 지붕은 각 기둥에 걸치듯 띄워져 당장에라도 날아갈 것 같은 모양새다. 본체와 지붕 사이 틈으로 하늘이 새어 들어온다. 김중업 건축이라고 하기엔 르코르뷔지에의 색채가 확연하다. 김중업은 이처럼 스승을 모방하고 변용하는 시기를 거쳐 자기만의 건축언어를 새로이 구축했다.
1962년 완공된 주한 프랑스대사관이 그 절정이다. 김중업은 입면도만 200장을 그리며 이 건물에 큰 공을 들였다. 프랑스대사관은 경사진 대지에 3개 건물이 각기 따로 놓여있다. 이들은 얼핏 서로 척진 것처럼 보이지만, 셋이 다 있어야만 온전한 짝이 된다. 역시 핵심은 지붕이다. 몸체에서 떨어져 1m 80cm가량 공중에 떠 있는 콘크리트 지붕은 끝부분이 하늘로 치켜 올라가 한국 전통 처마나 버선코를 연상시킨다. 답답한 정사각형 평면 건물에 비로소 시가 쓰인다. 김중업은 이 건축물로 1962년 서울시 문화상을, 1965년 프랑스 국가공로훈장과 공훈기사인 슈발리에 칭호를 받는다. 훗날 김중업은 프랑스대사관을 가리켜 “나의 작품세계에 하나의 길잡이가 되었고, 이것으로부터 비로소 건축가 김중업의 첫발을 굳건히 내딛게 되었다”고 자평한다. 이 건물은 현재 수차례 증축을 거치며 원래 모습을 잃었다.
이후 김중업은 “결국은 역사에 남을 수 있는 것은 조형성 때문이지 기능 때문에 남는 것이 아니다.”라며 연이어 형태주의 건축물을 선보인다. 특히 1967년 완공된 제주대학교 본관은 김중업식 형태주의 건축의 극치다. 2년간 이 작품 설계에만 매달린 김중업은 원과 곡선의 미학으로 바다로 향한 젊은이의 이상에 형체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프랑스 건축평론가 미셸 라공은 이 건물을 두고 “21세기 건축”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30m 떨어진 바다 위에 떠있는 호화 여객선 같았다는 게 당시 평이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이미 1996년 5월 철거됐기 때문이다. “집은 노래를 불러야한다.”는 김중업의 낭만은 쉽게 지워졌다.
김중업의 황금기도 오래 가지 못했다. 김중업은 1971년 11월 3개월 단수여권으로 강제 출국당한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건, 경기도 광주대단지사건 등을 공개 비판하다 입은 필화다. 반체제인사로 분류된 김중업은 직전 설계한 31빌딩의 설계비도 받지 못한 채 지난 15년간 다져온 기반을 송두리째 잃는다.
김중업은 1979년 유신이 끝나고 나서야 9년간의 유랑생활을 끝낸다. 귀국한 김중업은 1988년 5월 작고 때까지 샤머니즘 신화를 건축으로 구현하고자 한다. 현대인의 병든 인간성을 회복시키고자 함이다. “다시는 아우슈비츠의 집단학살을, 히로시마의 참극을 빚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병든 현대인들에게 차분히 진실을 위한 삶에의 뜻을 되새길 수 있는 아름다움 또한 그 자체의 알뜰한 공간들의 되찾음이 시급하다.” 이 같은 김중업의 철학은 육군박물관, 한국중소기업 은행 본점, 서울올림픽 평화의 문 등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