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_브로콜리너마저
연말이 되면 거리에 꾸며진 트리와 가게마다 흘러나오는 캐럴들로 따뜻한 분위기가 흘러넘친다.
한 편, 이 따뜻함 속 외로움을 느낀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모두 행복해 보이니까 행복해야 할 것 같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야 할 것 같아 연말이 외롭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경험 말이다.
외로움, 슬픔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정이다. 하지만 '감정 쓰레기통'과 '감성충'이라는 단어가 쓰이며
사회적 거리두기 이전, 감정의 거리두기가 먼저 다가왔다.
감정 쓰레기통은 자신의 나쁜 감정을 다른 이에게 끊임없이 늘어놓으며 상대방의 공감과 조언은 듣지 않은 채 자신의 감정만을 배설하는 사람을 칭하는데 이 단어를 듣고 혹시 나도 이런 적이 있을까? 생각해보며 자연스레 나의 고민을 다른 이에게 말하기보단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여과된 감정을 말하게 되었다.
감성충이란 sns에 자신의 감정을 나열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솔직히 공개적인 피드에 이런 글이 있으면 참 난감하다.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봐야 할 것 같고
물어보자니 이야기가 길어지며 나 자신이 위에 언급한 '감성 쓰레기통'이 될까 섣불리 물어보진 못하겠다.
두 단어가 쓰이는 공통적인 상황은 자신의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다른 이의 여과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받아주기란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감정을 털어놓는 사람도 이러한 단어들의 눈치를 보며 털어놓는 일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 내가 될 수 있다.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를 알아준 이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되지 못했으리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이 감정의 거리두기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코로나가 물러간다면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라지겠지만 이 감정의 거리두기는 무엇이 물러가야 할까?
내일은 출근해야 하고
주변의 이웃들은 자야 할 시간
벽을 쳤다간 아플 테고
갑자기 떠나버릴 자신도 없어
브로콜리 너마저_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