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장기기억력이 뛰어난데, 아마 지능지수가 높은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어렸을 때 있었던 일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나 혼자 기억하는 일이 꽤 많이 있다. 이 기억력이 공부에도 도움이 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순간기억력과는 다르다 보니 그렇게까지 힘을 쓰진 못하는 것 같다.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좋다. 특히 회사 업무에서도 자주 쓰는 숫자나 표현 등을 기억했다가 적재적소에 써먹을 수 있어 편리할 때가 많다. 공부에도 물론 큰 도움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장기기억의 영역에 들어간 것들은 거의 영구적으로 까먹지 않게 되니 편리한 부분이 있다.
이렇게 좋은 기억력을 가졌다는 것은, 반대로 잊고 싶은 기억도 오랫동안 머리에 남아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때로는 어떤 기억은 돈을 주고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아래는 나 혼자서만 기억하고 있는(혹은 그럴 것으로 예상되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인데, 읽어본다면 내가 왜 어떤 기억은 지우고 싶어 하는지 누구나 공감하리라 생각한다.
# 부모님 직장 문제로 외조부모님의 댁에서 지내던 3살 무렵, 감기에 걸린 내게 할아버지께서 아이스크림(콘이었음)을 사주신 적이 있다.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귀가한 감기 걸린 외손주를 본 할머니께서는 잔뜩 화가 나신 나머지 할아버지께 앉았다 일어나기 N회 벌칙을 주셨다. 그리고 나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그걸 지켜보았다. 이 에피소드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한 온 가족 중 나만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다.
# 친할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옛날부터 이미 머리카락이 없으셨다. 6살 때였던가, 명절날 오랜만에 뵌 할아버지께 달려가 안기며 동시에 첫인사로 "할아버지는 왜 대머리세요?"라고 공손히 여쭤본 기억이 난다. 그때 아마 대머리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응용해 본 게 아닐까 싶다. 할아버지는 그날 내게 주실 선물로 경찰차 변신 로봇을 사들고 오셨는데, 보자마자 그런 질문을 하는 손주가 괘씸하셨을까, 아니면 귀여우셨을까.
#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머니께서는 출근길에 나를 등교시키곤 하셨다. 하루는 미적대는 나 때문에 직장에 지각하게 되신 어머니께서, 출근하는 차에서 내 머리채를 잡으셨다(정확히 등굣길 중 어느 지점에서 잡혔는지도 기억이 난다). 나중에 말씀드리니 매우 미안해하셨지만 기억은 못하셨다. 참고로 저 시절엔 정말 유별나게 느려터진 아이였기 때문에, 혼난 게 별로 억울하지는 않고 딱히 그로 인한 PTSD 같은 것도 없다. 게다가 나도 직장인이 되어 출근 시간의 압박감을 이해하게 된 지금은 그저 웃픈(?) 에피소드로 기억하고 있다.
# 초등학교 2학년 때 나는 검도를 잠깐 배운 적이 있다. 학교에서 몇몇 친구들과 함께 '죽도를 든 사람과 목검을 든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 따위의 논쟁을 벌였다. 나는 죽도를 든 사람이 이긴다에 전재산을 걸겠다고 선언한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내 전재산은 하루 500원이었고 모은 재산은 없었으니 하루치 간식을 포기하는 엄청난 도박이었는데, 당연히 승패는 나지 않았다. 추가로, 여러 친구들 중 나와 반대편에 있던 남자아이 한 명의 이름과 얼굴만 정확하게 기억이 난다.(그런데 정말 누가 이길까)
# 대학생 시절,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생일 기념 폭탄주(이른바 생일주)를 만들곤 했다. 이때 친구 중 한 명이 술에 넣으면 큰일 날 무엇인가를 넣으려고 했던 기억이 있다. 10년이 지나 그 시절 이야기가 다시 나왔을 때, 넣으려고 한 게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는데, 더 나아가 대부분의 친구들은 고작 10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예 그 일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이처럼 시기를 막론하고 내 기억력은 아주 상세하고 오래 가는 편이다. 이런 기억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스치듯 지나가는 일이지만 나는 아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상황을 기억한다는 점이다. 예시에 든 내용은 크게 혼났다거나 밝혔을 때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은 아니지만, 아주 크게 혼나거나 망신을 당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일들도 실은 굉장히 많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언급한 기억들 가운데 중~고등학교 시절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매일 밤 12시까지 학원과 독서실을 드나들며 공부만 해야 했던 그 시절의 기억 중에는 가볍게 떠올릴 만한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모든 부모님들이 이 부분을 반드시 유념했으면 좋겠다. 아이의 기억력은 때로는 상상을 초월하며, 어떤 상처는 평생 기억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내 기억력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유별난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어쩌면 내가 가진 고지능자의 특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똑똑한 영재이길 바라지 않는가. 그렇다면 더더욱 유념했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혼내는 이 순간이 아이에게는 평생 떠올리고 아파할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