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품새만으로 승부를 봤던 나의 태권도 실력

by 립미얼론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아이라면 으레 태권도장 한 번쯤 다녀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도 어렸을 적에 동네 태권도장에서 열심히 무예를 익히는 꼬마였다. 하지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모두가 잘할 수는 없는 법. 신체 조건부터 싸움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나는 겨루기를 할 때마다 발차기 찜질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시절 태권도 수련생들에게 있어, 한 달에 한 번 돌아오는 승급심사는 띠 색깔이 바뀌는 아주 중요한 행사이다. 태권도의 띠란, 태권도장의 부가수익관원들에 대한 동기부여 사이 어딘가에서 줄타기하는 그런 물건으로, 어지간히 못하지 않는 이상 띠 판매를 통한 부가수익(?)과 동기부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다음 띠로 승급시켜 주는 것이 보통이다. 나 역시 형편없는 겨루기 실력을 지녔음에도 매달 있는 승급심사 때마다 무난하게 다음 띠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어영부영 빨간 띠까지 따게 되었고 어느덧 품띠로 진급을 코앞에 둔 시점이 되었다. 품띠는 유소년 수련자에게 검은 띠 대신 부여하는 띠로, 이 단계부터는 추후 국기원에서 단증으로 교환할 수 있다. 따라서 도장에서 관장님, 사범님들의 심사 하에 간소하게 진행하던 이전의 승급심사와 달리, 승품심사에서는 심사위원이 도장으로 직접 나와 심사를 하였으며 훨씬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이 시기쯤 내 태권도 실력에는 여전히 나갔다 하면 맞고 돌아오는 겨루기 실력 외에 내세울 만한 강점이 하나 생겼는데, 바로 뛰어난 암기력에 기반한 품새 실력이었다. 나는 당시 약 두 달 정도 새벽반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새벽반인만큼 아무래도 초등학생이 대부분인 오후반과는 달리 중학생 이상의 고단자들이 다수였다. 나는 그곳에서 선배들이 배우는 품새를 살짝살짝 엿볼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1/2/3품 수련자가 수련하는 고려/금강/태백을 외우게 되었다. 참고로 이 글을 쓰면서 정확한 정보를 위해 다시 찾아본 바로는, 빨간 띠에서 1품으로 승품할 때는 태극 1장~태극 8장 중 2개의 품새를 랜덤으로 지정하여 하게 되고, 1품에서 2품으로 승품할 때는 태극 1~8장 중 1개, 그리고 고려를 필수로 하게 된다고 한다. 즉, 나는 아직 고려를 배울 필요도 없었던 빨간 띠 시절, 어깨너머로 보면서 4품 승격 때나 필요한 태백까지 익혔던 것이다.



벌써 20년도 넘게 지난 심사 날 당일의 기억은 파편적으로 남아있다. 태극 1~8장 중 어떤 품새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심사 대상이었던 여러 아이들이 단체로 동시에 품새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나서 관장님께서 "혹시 고려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물어보셨다. 당연히 빨간 띠 아이들 중 고려를 할 줄 아는 아이가 나 빼곤 있을 리 없었다. 결과적으로 관장님 이하 심사위원 분들, 그리고 둘러앉아 지켜보는 관원들의 앞에서 나 혼자 고려, 금강, 태백까지 시연했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심사위원들께서는 뛰어난(?) 품새 실력에 감명을 받으셨는지, 형편없는 겨루기에도 불구하고 1품을 딸 수 있었다. 1년 정도 더 다닌 끝에 2품까지 따고는 태권도를 그만두었으며, 성인이 되어 품증을 단증으로 교환받아, 국기원 공인 유단자가 되었다. 가히 철저하게 두뇌로만 이뤄낸 쾌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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