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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큰한 시절의 조명, 온도, 습도

콩콩팥팥

by 단아

중학교 때부터 7-8년 정도를 이종사촌들과 함께 지냈다. 언니들과 무척 잘 어울렸는데 정점은 쌍둥이 언니와 내가 법적으로 음주가 허용된 순간부터였다. 우리는 자주 마셔댔다. 추우면 추운 대로, 날씨가 좋아서, 더우면 덥다고, 속상하고 기쁜 순간에도 함께 마셨다. 저녁 밥상머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부어대다 보면 얼큰해졌고 좁은 집은 큰 이모의 잔소리로 메워졌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던 늦은 오후, 일곱 시에 퇴근하던 작은 언니를 기다렸다. 살짝 노을이 내려앉았고 후텁하던 공기는 시원해진다. 현관 밖으로(다세대 주택 1층) 고양이들이 어슬렁 거렸다. 작은 언니가 모습을 드러내면 시큰둥하게 맞이하고 이내 오미자 막걸리를 꺼냈다. 가까운 곳에 따로 살던 엄마의 기이한 애정으로 김치냉장고에 한동안 막걸리 마를 날이 없었다. 막걸리는 요사스럽게 고운 분홍 빛에다 과히 텁텁하지 않아 술술 넘어갔다(이유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다). 호기롭게 한 통 더, 한 통 더를 부르짖다 보면 훌쩍 아홉 시를 넘겼다. 어떤 얘기를 주고받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무척 즐거웠다. 큰언니까지 모이면 한층 더 시끌벅적했다. 그 순간들을 애정했다.



명절에는 낮부터 마셨다. 제사 없는, 가부장이 부재한 집은 가족들끼리 먹기 위해 정말 많은 양의 전을 부쳐댔다. 갓 구운 전에다 빨대 꽂은 생맥주를 들이켜다 보면 추석? 별 거 없었다. 술이 떨어질 때쯤 작은언니의 전 남자 친구이자 지금의 남편인 형부에게 맥주가 없다고 앓는 소리를 해댔다. 그러면 30분이 지나지 않아 마법처럼 술을 들고 등장했다(참 다정한 사람이다). 전 푸닥거리가 끝난 뒤에는 박박 씻어 기름 쩐내를 희석시키고는 라면을 끓인다. 술이 빠질 수 없다. 명절 당일엔 장사를 쉬는 이모들도 합세했다. 엄마는 항상 일찍 자러 갔다. 술을 마시지 않는 큰 이모는 늘 자리 한편을 지켜주었다. 와하하 깔깔깔, 의미 없는 쉰소리의 향연들. 이모들은 자식새끼(조카들)의 귀여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다시 얼큰해진다. 다들 모나고 별난 구석이 심상찮았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롭지 않았다. 참 독특하게 살았다. 이 시기에 많은 것이 녹록지 않았지만 우리는 자주 즐거웠다.



큰 언니가 결혼했다. 조금 멀리 살기 시작했다. 저녁의 술자리는 조금 조촐해지고 명절 행사인 전 굽기의 메인 자리는 작은언니가 이어갔다. 첫 조카가 태어났다. 1년간은 함께 살다시피 했다. 조카는 무척 사랑스러웠다. 그 작은 생명이 온 세상의 사랑을 집으로 들였다. 잠이 없는 형부를 닮아 일찍 일어났고, 늘 우리 방문 앞을 기어 오다, 어느 순간엔 문을 두드리고, 걷고, '일어나라'라고 말을 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아이가 있어도 마셔댔다. 모유수유를 하는 언니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어우 어떡해..' 하며 하나마나한 말을 내뱉고는 까르르 깔깔. 말을 워낙 많이 해서인지 마신 양해 비해 덜 취했다. 어지간해선 블랙아웃도 없었다. 그러다 둘째 언니도 결혼을 하게 되었고, 우리도 나가 살게 되었다. 그 무렵 막내 이모가 지병으로 돌아가셨고, 윗 세대 자매들의 사이가 극도로 악화되어 집안 분위기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큰 이모는 그 집에 혼자 남았다. 얼큰하고 다복한 시기가 막을 내렸다.



둘째 언니의 딸, 우리의 막내 조카가 태어났다. 상냥한 언니의 어여쁜 딸이었다. 기꺼이 지갑을 태웠고 아깝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그러다 나는 얼레벌레 결혼해 한양 상경을 하게 되었다. 핏줄들과 멀어졌다. 쌍둥이 언니는 본가에 있다. 조카들은 자라고 있고 막내 이모는 추모공원에 가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의 빈자리가 출생과 성장으로 채워졌다. 인생사 다 이렇게 사는 거지 하면서도 가끔 얼큰했던 시간이, 온도, 조명, 습도(!)가 무척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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