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콩팥팥
이모 1, 이모 2, 이모 3, 엄마. 모계의 네 자매를 다시 읊어본다. 이모 2, 3은 결혼과 자식이라는 정상성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가 이모들의 자식이다. 막냇동생의 딸이자 쌍둥이들은 많이 사랑받았다. 지금의 나보다 젊었던 이모들은 철마다 백화점에서 꼬까옷을 사주었다. 어디 그뿐이랴. 쥬쥬나 미미로 불리던 바비인형류의 인형옷과 주말바다 배가 터지도록(결국 배탈이 났던) 먹었던 과자들까지. 새벽 장사로 고단 했을 텐데 놀이의 악당 역할을 도맡아 해 주었다. 특히 이모 2의 마녀 역할은 맛깔났다. 특유의 대사와 제스처에 우리는 많이도 웃었다. 꽁꽁 숨겨두었던 색색의 보자기를 끄집어내 몸에 두르곤 내가 공주 입네 했고 이모 2는 늘 마녀였다. 언덕 위 낡은 주택의 2층과 계단에서 알록달록한 시간을 보냈다.
이모 2와 이모 3은 장사를 했다. 주로 호프집이었다. 주류와 과일 안주 등등을 팔았다. 업종 탓에 자정이 넘은 시간까지 일 할 때가 많았다. 나와 언니는 이모들의 가게에서도 종종 놀았다. 교복 입던 시절에도 하굣길에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엄마랑 싸웠을 때, 혼났을 때, 속상한 일이 있을 때, 그냥 보고 싶어서, 이유는 다양했다. 이모들이 참 좋았다. 왜 좋은지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좋았다. 이모들의 업종에 대한 세간의 시선 따위(그리고 그때는 정말 몰랐다) 신경 쓰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모들이 성실하게 일을 한다. 그 노동의 결과로 조카들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이모들이 자랑스러울 이유로 충분했다. 그래서인지 이모들의 가게로 누군가를 데려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중학교 때 어쩌다 보니 가까워진 학교 선생님이 있다. 가족 이야기를 했었나 보다. 거기엔 이모들의 장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초대했고, 방문했다. 그 후에도 몇 번 다녀가셨다 한다. 한참 지난 다음에 이모들이 이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했다. 참 신기하다고. 보통 부모의 술장사를 부끄러워한다는데 사춘기 때의 학교 선생님을 가게로 뫼셨다. 신기하다고 한 것이 신기했다. 이모들은 좋은 사람이고, 음식은 맛있고, 손님도 많았으니 약주를 즐길(거라 예상되는) 사람을 안 데려갈 이유가 더 적지 않은가.
실은 그런 합리성 따위 따지지 않았다. 따질 이유가 없었다. 사랑하는 이모들이 사력을 다해 꾸린 생활의 터전이다. 알코올을 판매한다 해서 가족들을, 조카들을 키우기 위한 노동이 폄하될 순 없다. 체구가 작고 여린 그녀들이 최선을 다해 키웠다. 나이를 더 먹은 지금도 생각에 변함은 없다. 이건 훼손될 수 없는 자부심이다. 부끄러워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드높은 자기 연민에 양육비의 의무를 저버린 사람, 한 때의 사랑의 결실을 철저하게 외면했던 사람이다. 물론 각자의 사정이 있었음을 이해한다. 이해는 하되 겸연쩍었으면 좋겠다. 이모들은 달랐다. 자신이 책임이 아닌 어린 생명들을 살피고자 했다. 가부장이라는 보편의 삶 밖에서 살아내려 애썼다. 거칠고 모진 세월 안에서 서로 사랑했다. 이모들의 고단함을 토대 삼아 비교적 안온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이모 3은 13년 전 일찍 떠났다. 암이었다. 초기 오진으로 치료 시기가 늦춰진 것이 컸다. 우리 이모 참 예뻤는데. 몇 년을 고생하다가 너무 빨리 가버렸다. 그때 언니들과 병실을 돌아가며 지킬 때도 있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쇠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생각보다 고통스러웠다. 평생 의지하며 함께 살았던 이모 2의 마음은 부서졌다. 피붙이이자 동반자가 사라졌으니 그 슬픔이 오죽했을까. 이모 2는 산산이 부서진 시간을 억지로 견뎠다. 엄마도 정말 많이 애썼다. 이사 후 이모 2와 엄마, 나, 언니, 동생은 함께 살았다. 우당탕탕 시끌벅적했지만 함께 웃는 날도 많았다. 그런데 이모 2가 아프다. 이모 3과 다른 암이다. 정신줄을 부여잡았다. 예전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지만 지금은 있으니 부지런히 움직였다. 좋은 곳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당분간은 조립식 가족이 이모의 치료에 집중해야 한다. 받은 사랑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어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