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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만 있지 않았다

네덜란드 황금기 미술의 위엄과 자긍심이 넘치는 델프트의 마우리츠하위스

by 네딸랜드

콜린퍼스의 명연기와 스칼렛 요한슨의 오묘한 눈빛 연기가 참으로 인상적이었던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팩션(faction) 소설을 영상으로 만든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어느 깊은 가을밤 혼자 깨어 숨죽이며 볼만큼 내겐 가슴 떨리던 추억의 영화다.

영화 속 델프트의 풍경은 안개빛 가득한 신비로운 도시였다. 마치 화가 베르메르 자체가 신비로운 존재였고 작품 여주인공이자 명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눈빛을 품고 있듯이 영화 속 델프트 풍경은 내내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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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로 요하네스 베르메르를 꼽고 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명화 '델프트 풍경'을 보고 이를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라 칭했다. 델프트 그곳은 아름답고 서정성 짙은 곳으로 이 영화의 주된 배경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베르메르의 고향이니까.

mug_obj_143274969725397546.jpg Johannes Vermeer ,델프트 풍경 1660년
mug_obj_143271993806218368.JPG 델프트 시청사

델프트는 내게 너무나 아름답게 각인된 도시다. 아이들과 여러 번 갔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또 가고플만큼 풋사랑같이 아련하게 어여쁜 도시.

mug_obj_143271968122233882.JPG 델프트의 베르메르 하우스 앞 풍경 , 베르메르의 작품을 규브 속에 담아두었다


아이들과 처음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Mauritshuis)에 갔을 때 영화에서처럼 잿빛 하늘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감도는 초겨울이었다(마우리츠 하위스는 델프트와 가까운 헤이그에 소재하고 있다).

mug_obj_143272339749876446.JPG 마우리츠하위스와 빈넨호프 뒷면의 운하

약 3년 전쯤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이 새단장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서둘러 가서 마치 일생에 보기 힘든 귀한 사람 알현하듯 그 작품들을 보고 왔었다. 미술관 옆이 그 유명한 빈넨호프(Binnenhof)인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말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기 시대에 활동한 거장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는 이 미술관은 브라질 총독이자 나사우 지헌(Nassau Siegen)의 백작이었던 요한 마우리츠(Johan Maurits)의 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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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미술관 자체도 네덜란드 건축사에 빛나는 보배 같은 건물이다. 당시의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네덜란드 고전양식이고 건축가 야콥 반 캄펜(Jacob van Campen)과 피테르 포스트(Pieter Post)가 설계한 곳이다.


네덜란드엔 그런 박물관이 많다. 건물 자체가 세계문화유산이거나 건축사적 의의가 큰 건축물들이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탈바꿈되어 그 보존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이것 참 부럽다! 오래된 것을 고물 취급하지 않고

고전으로 예우하는 태도 말이다.

mug_obj_143271967878266274.JPG 매표소가 있는 지하로비로 들어가는 엘리베이터 - 재개관 이후 생겼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진주보다 더 귀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러 오는 수만 수십만 사람들. 이 소녀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그녀와의 만남 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가짐으로 돌아갔을지 짐짓 궁금해진다.

mug_obj_143271794288414795.JPG 이 작품 앞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특히 일본인들 너무 많다


북유럽의 모나리자, 네덜란드의 모나리자라는 비유에 걸맞게 찾아오는 손님들을 말없이 응시하는 진주 귀걸이 소녀의 몽롱한 듯 신비한 눈빛과 입술. 역시나 그 작품 앞에서는 수많은 인파들이 저마다 인증숏 남기느라 바쁘다. 액자 속의 소녀는 언제나 고요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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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고 단호한 메시지보다 야릇한 듯 모호한듯한 메시지에서 더 큰 울림을 듣는 경우들이 가끔 있다.

닫힌 질문보다 열린 질문에서 더 많은 감동과 도전을 주는 것처럼

애매함이 다의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양성과 가능성의 여지는 남겨두니까.

mug_obj_143271899407478250.JPG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꽃그림의 걸작으로 꽃도 하나의 주제로 당당하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mug_obj_143271692652495040.JPG 네덜란드 미술관에서는 종종 저런 꽃꽃이를 볼 수 있다 화훼의 나라답게


또 다른 말로 여운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여운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 시간 동안 자기 자신이 자라고 커가게 된다. 그걸 우린 성숙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그림을 보고 즐기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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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네 딸들아


어떻게 하면 저렇게 잘 그릴 수 있어?
엄마 이건 진짜 같아
저건 램브란트 자화상이잖아?
이 사람은 표정이 왜 그래?
엄마 이건 성경에 나온 이야기 같아
이건 우리 동네 풍경이랑 비슷해


이렇게 조잘대던 너희들의 목소리가 엄마에겐 그림처럼 선명하게 기억되었단다. 너희에겐 반 고흐, 램브란트, 베르메르 작품은 참 친근하게 다가오나 보다. 어느 미술관을 가든지 그들의 작품은 잘 알아보는구나

mug_obj_143274936110054182.jpg Jan Brueghel the Elder, Peter Paul Rubens, The Garden of Eden with the Fall of Man, c. 1615

( 루벤스와 브뤼겔의 협작으로 이 미술관의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작품 말고도 여기엔 이 미술관이 자랑스러워하는 걸작이 많아


베르메르가 남긴 두 점의 풍경화 중 하나인 델프트 풍경. 나머지 하나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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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은 어떤 감상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반가웠다. 편안한 마음으로 보는 풍경화였어. 우리가 늘 접하는 그 풍경이 묘사된 유사성에서 느끼는 동질감과 편안함 말이야.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매일같이 마주하는 하늘이 그림에서처럼 시야의 2/3가 하늘이잖니..

네덜란드는 언덕과 굴곡이 없는 평지라 하늘을 마음껏 품을 수 있지. 그래서 하늘의 구름도 그렇게 다양하다는 것이 참 행복하지. 날씨는 변덕스러워서 파란 하늘과 새하얀 뭉게구름과 먹구름을 동시에 볼 수 있던 적이 너무 많았잖아.

어디서 비추는지 모르지만 그 어느 구름 속에 숨어서 내뿜는 햇빛을 보면 가슴 벅찬 사실 하나 깨닫게 되잖아


어두움 속에서도 어느 구석에는 빛이 있다는 것!

mug_obj_143271555041747742.jpg Peter Paul Rubens, Old Woman and Boy with Candles, c. 1616 - 1617

우리 인생에도 흙같이 어두울지라도 어디선가 움터오는 한줄기 빛 때문에 희망을 가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지.
그리고 어두움이 깊을수록 빛의 또렷함은 더욱 드러난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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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cob van Ruisdael의 풍경화/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시대는 미술사에서도 전성기였다. 귀족층 외 일반 서민층도 풍경화나 꽃그림을 집안에 걸어두었다. 지금도 네덜란드 가정에는 늘 그림이 걸려있다)


빛의 마술사처럼 베르메르는 그렇게 그림을 그려왔어. 창가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빛을 참으로 정적 이도록 우리를 어느 시선에 머물게 하여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거울 같은 그림들이 많은 것 같아. 그게 베르메르의 매력인가 봐. 하지만 그 매력을 주기까지 그의 삶은 그리 만만한 삶은 아니었던 것 같다.

mug_obj_143272995605083555.jpg Johannes Vermeer, Diana and her Nymphs, c. 1653 - 1654

(베르메르의 초기 작품에는 성서나 신화의 장면을 그린 것들이 있다)


이는 램브란트의 자화상들을 보면 더더욱 더욱 공감하게 된단다. 표정 하나하나, 붓칠 하나하나에 인생을 담고 마음을 담고 감정을 담아낸 그 손놀림을 보면 엄마도 나눌 이야기가 생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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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브란트의 또 하나의 걸작 중 하나인 '해부학 강의'


엄마는 이 그림을 보니 엄마가 참여하여 활동하는 합창단 친구의 장례식이 생각났단다. 이 나라 장례문화는
다소 우리나라와 다른데 사람이 죽고 난 후 그 유해를 장례식이나 장례예배까지 집 안에 모셔둔다. 그리고 교회나 성당에서 장례식이나 장례예배가 진행될 때 한쪽 구석에 곱게 차려 입히고 화장한 유해를 한껏 꾸민 관 속에 안치하고 뚜껑을 덮지 않은 상태에서 조문객들에게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지. 엄마에겐 문화충격이었고
또 한 편 무언가 대단함을 느끼게 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니 해부 대상인 죽은 이의 모습과 오버랩된다.

mug_obj_14327179397671946.JPG 램브란트 , 해부학강의

핏기와 살기 없는 잿빛. 칙칙함이 아닌 먹먹함조차 감당하기 힘든 생기 없는 차가운 색을 표현한 것에 놀라웠어. 태연하게 해부를 하는 의사와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과 그들 사이에 오가는 말없는 대화. 또 그림을 보는 이들을 빤히 쳐다보는 두 사람까지. 아울러 그 그림을 보는 이들의 심상치 않은 감정의 교류들.


그런데 네 딸들아. 엄마를 한없이 잡아끈 그림은 이것들이었단다. 그 그림들 앞에서 엄마는 그 자리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어.


mug_obj_143271693262827655.JPG 아렌트 드 겔더 (Arent de Gelder), 시므온의 찬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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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g_obj_143271794048035211.JPG Rembrandt van Rijn,Simeon's Song of Praise, 1631

아렌트 드 겔더는 램브란트의 마지막 제자로 주로 성화를 많이 그렸대. 램브란트는 이 그림을 25세에 그렸다는구나. 엄마도 시므온과 안나에 대한 깊은 감동을 스물 세 살 내지 네 살에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단다.


시므온이 일생동안 기다려 온 메시아

그를 보자마자 찬미하는
환희와 기쁨과 영광을
그려낸 두 화가들의 마음

진정 기다림의 본질은 이래야 했었다.

기다림. 엄마 인생의 화두는 늘 기다림이었단다.

온몸이 뒤틀릴 만큼 힘겨운 기다림 속에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힘겨운 발걸음들이었지

기다림이 오래되면 간절함이 되고 간절함은 갈증으로 가득 찬 갈망으로 바뀌고 이는 고통으로 이어진단다.

mug_obj_143274953483177866.jpg Hendrick Avercamp, Ice Scene, c. 1610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예전에는 겨울에 운하가 얼면 그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고 썰매를 타며 놀기도 하고 경주도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뱃속에서 너희들을 품고 열 달을 무려 네 번씩이나 기다린 것은 엄마에겐 기쁨의 고통이었단다.


고통에는 두 가지가 있단다.
하나는 괴로운 고통
하나는 즐거운 고통, 쾌통이라고 해

전자의 것은 피하고 싶고 견디기 힘든 쓰라림의 고통이고
후자는 의미 있는 기쁨을 맞이하기 위해 마땅히 감내하는 고통, 산통이 대표적인 것이겠지?


너희들을 만나기 위해 '열 달의 기다림의 고통뿐 아니라 마지막의 산통을 끝내야 너희들을 하나씩 만날 수 있는 것처럼

mug_obj_143271628028189633.JPG Jacob Jordaens , 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 c.1617


삶 속에는 크고 작은 고통들이 존재한단다. 때론 준비되지 않은 가운데 만나기도 하고 때론 도망가는데도 끝까지 쫒아오는 고통도 있고, 별거 아닌 줄 알았는데 엄청난 것이었고,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불쑥 찾아와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자신을 호령하는 고통도 있단다.


mug_obj_143271898917165318.JPG Frans Hals, Laughing Boy, c. 1625

(처음 이 그림이 하를럼에 있는 프란스 할스 뮤지움에 있는 줄 알고 열심히 찾았었는데, 이 곳에서 환하게 웃고 있구나 덕분에 엄마도 한껏 웃었다. 이렇게 호탕하게 웃어보는 것도 고통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지... 그런 고통을 하나씩 마주하고 조심스럽게 대하다 보면 이젠 자발적으로 쾌통을 향하여 나가게 된단다.


여기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진다. 고통을 겪어보았기에 그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미 있는 고통을 선택하여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는 것이야.


엄마가 너희들에게 하고픈 말이다.


긴긴 인생에 수없이 반갑지 않은 고통이라는 친구를 잘 사귀어라. 그리고 가장 훌륭한 벗으로 만들어라
그러면 고통이 너를 도와 네가 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때에 맞게 안내할 것이다.

mug_obj_143271899140056865.JPG Jan Steen, Moses and Pharaoh's Crown,c. 1670

역사는 그렇게 바뀌는 것이란다. 쾌통을 선택하는 자에 의해서 조금씩 아름답게 바뀌어 가는 것이란다.

아프겠지. 눈물도 흠뻑 쏟아내겠지. 두려워하지 말고 그 쾌통을 기꺼이 상대하여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수고로움을 행하렴.

그럼 먼 훗날 너희들의 고통에 감사하는 이들이 너희들의 무덤을 찾을 것이다.

mug_obj_143271693198664549.JPG Paulus Potter, The Bull,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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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터의 황소 작품은 벽 한 면을 차지할 만큼 큰 그림이다. 아주 정교하게 실제적으로 그렸다. 가까이 서보면 그 섬세함에 또 진짜 소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두 번째 사진은 소만 더 확대해서 찍은 것)

고통을 온몸으로 감지하며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고 시를 쓰고 아픈 자들과 함께 뒹굴던

이러한 소수들로 인해 다수가 위안을 얻고 즐거움을 누리며 살듯이
그런 예술가적인 혼을 지니고 살아가길 바란다.

엄마는 너희들을 자랑스러워하며 기쁨으로 너희에게 진주 귀걸이를 달아줄 것이다.




< 마우리츠하위스의 걸작들 >

mug_obj_14327179445493701.JPG Frans van Mieris I , Man and Woman eating oysters, 1661

이 시기에 종종 등장하는 남녀의 굴 먹는 모습, 굴은 사랑을 상징한다고 한다. 좀 구린 사랑?


mug_obj_143273373029940563.jpg Hans Holbein the Younger, Portrait of Robert Cheseman (1485-1547,1553)

1533 귀족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mug_obj_143452151283735324.JPG Carel Fabritius, The Goldfinch, 1654

이 미술관의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황금 방울새 그림, 방울새는 당시에 인기 있던 애완용 새이다. 도나 타트의 소설 출간으로 이 그림이 더 유명해졌다. 화가 카렐 파브리우스도 화약고 폭발 사고로 숨졌다고 전해진다


mug_obj_143274686086921998.jpg Jan Steen, 'As the Old Sing, So Pipe the Young', 1668 - 1670


얀 스테인은 네덜란드 풍속을 해학적으로 잘 그려냈다. 이 작품 말고도 다수의 네덜란드 사람의 생활을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일종의 속담이다. 굳이 우리말로 바꾸어 말하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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