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골 박물관에서 오르골 연주 소리에 맞춰 인생 춤 춰요
한국에서는 5월 5일이 어린이날이라 나들이를 가거나 가족여행을 가거나 놀이동산 가거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즐겁게 보낸다. 이 곳 네덜란드에서는 이 날이 독립기념일(liberation day)이다. 그리고 하루 전 날은 현충일 같은 날(remembrance day)로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은 전사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이 나라에 온 다음 해 어린이날 한국식으로 가족나들이를 하였다. 물론 묵념의 시간을 가진 후에 .
위트레흐트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으로 알려진 오르골박물관이 나들이 행선지였다. 박물관이 있는 골목에 들어서자 커다란 오르골 두세개가 있었고 발랄한 오르골소리가 마치 환영축주처럼 들렸다.
이 곳뿐 아니라 인근 다른 나라에 가보면 골목마다 거리의 악사들이 악기들을 들고 연주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도시마다 이동식 놀이공원 (kermis) 이 마련되어 있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때 흥겨운 음악소리가 울려 퍼져 마치 마을 전체가 커다란 축제를 하는 것 같은 풍경도 많이 펼쳐진다.
그 흥성스러운 풍경을 더 신명 나게 해주는 악기가 있다. 풍금소리에 대한 향수를 품고 애정 어린 눈망울로 바라보면 바퀴 달린 커다란 뮤직박스가 눈으로 귀로 들어오게 된다. 뮤직박스는 다른 말로 오르골이라고 부른다.
오르골은 1700년대부터 사용해 온 오랜 역사를 지닌 악기다. 자명종, 교회 시계 등도 오르골의 일종이라 볼 수 있다.
아이들이 즐겨보는 동화책 '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에서 막내 염소가 숨어있던 시계도 오르골이다. 흔히 말하는 뻐꾸기시계도 오르골과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셈이다.
아주 먼 옛날에 유럽 사람들은 여러 가지 진귀한 오르골을 가지고 있는 것을 크나 큰 자랑거리로 여겼다. 교회나 성당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음악을 집에서도 들을 수 있게 해 준 고마운 악기이기도 했다. 한때 유럽에서는 어느 나라에서 가장 큰 오르골을 만드는가 경쟁이 붙기도 했었다.
어느 나라에서 가장 큰 오르골을 만들었을까?
바로 네덜란드이다. 국토 대부분이 평지인 까닭에 네덜란드 내에서 바퀴를 달아 이동하기도 수월했다고 한다.
막내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 박물관이 오르골 박물관인 것으로 기억한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신기한 것 처음 구경하는 설렘 가득한 눈으로 화려하다 못해 현란한 오르골을 보며 아주 흥겨워했다. 전시장 전부를 울릴만한 커다란 음향 속에서 움찔움찔 거리면서도 저절로 신명이 나는 바쁜 몸놀림이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 목걸이나 반지 귀걸이를 담던 자그마한 뮤직박스만 알고 있다가 이 곳에서 경험한 뮤직박스 즉 오르골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놀라운 신세계였다.
매시 정시에 시작되는 가이드 투어에 참여하여 친절한 가이드의 설명도 듣고 하나하나 오르골을 연주하는 모습을 보았다. 중간중간 설명을 듣고 있는 아이들에게 직접 오르골을 돌리며 시연해보는 기회도 준다.
사람 없이 혼자 연주하는 유령 오르골.
앤틱 한 시계 속의 오르골.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만한 작은 오르골(아마 이것이 제일 익숙한 오르골일 것이다)
바이올린, 피아노와 협주되는 제일 근사한 오르골.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바퀴 달린 오르골.
토끼가 튀어나오는 오르골.
아크로바틱 포즈를 취하는 오르골.
오케스트라 협주 소리를 낸다는 오케스트라 오르골 등.
무엇보다 가이드 투어 마지막 즈음에 도착한 커다란 홀에서의 댄스파티가 제일 신나고 신기한 시간이다.
마을 잔치 열린 것처럼 크게 소리 내는 거대한 오르골 소리에 맞추어 함께 한 관람객 모두가 춤을 추던 곳.
고전 명화를 전시하는 미술관 같은 고풍스러운 홀에서 오르골 소리에 맞춰 댄스파티를 하는 광경을 보며 아이들 모두 어색해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줌마 아저씨 젊은 남녀들 어린이와 아가들까지 함께 오르골 연주 소리에 맞추어 모두 자연스럽게 춤을 추는 모습. 네덜란드 사람의 자유함을 보고 신선한 문화충격을 받기도 했었다. 박물관 구경하다 춤을 추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첨단기술의 발달로 새로운 악기들이 태어나면서 과거 속으로 사라져 간 오르골들을 모아 박물관을 만들고 자부심으로 그 명맥을 이어간다는 것이 대단하다.
한때는 저 악기를 만드는 악기 장인들도 많았을 텐데 오르골을 가지고 자신만의 음악을 향유하던 이들의 아날로그적 취미가 요샌 골동품으로 변해가고 있다.
사랑하는 네 딸들아
세월은 흘러간단다.
사람도 변해간단다.
거기서 무엇을 붙잡고 무엇을 바라보는지는 제각각이다.
그리고 과거는 남는다.
때로는 추억하고 향수하기도 하지만
덮어버리기도 하고
아예 없었던 것처럼 숨겨두기도 하고
필요할 때만 끄집어서 과거를 마주하기도 한다.
마치 오르골, 뮤직박스의 연주를 듣고 싶을 때만
뚜껑을 열고 태엽을 돌리듯이
과거가 진정 그런 것일까?
너희들에게 오르골 박물관 관람은 흥겨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분명 너희들의 표정이 그랬었다.
위트레흐트(utrecht)에서 가볼만한 곳으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많이 있지. 다채로운 시각적 자극과 오르골 연주라는 즐거운 청각적 자극이 충분한 곳이기에 게다가 무도회장 조명과 인테리어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주는 효과까지 선사해주니 당연 그럴 것이다.
그런데 엄마는 생뚱맞게 오르골 아니 뮤직박스를 보면 엄마 대학시절에 보았던 영화 ' 뮤직박스'가 생각나기도 해.
코스타 가브라스가 감독하고 제시카 랭이 주연이었던 법정영화이지.
헝가리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인 아버지가 이민국으로부터 서류에 허위사실을 기재했기에 미국으로부터 추방되어 헝가리로 소환하겠다는 통보를 받지. 형사사건 전문 변호사로 명성이 높던 딸이 아버지를 변호하는 내용이야.
그런데 그 자상하고 인자하고 성실한 시민이었던 평범한 아버지는 과거 유대인을 학살에 앞장선 나치 전범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지. 신분을 세탁하고 철저히 숨긴 채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온 아버지에게서 악마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던 딸은 아버지를 믿고 변호한단다. 때론 갈등하기도 하고 의심을 하기도 했지만 치열한 공방 속에 딸의 뛰어난 변호 덕으로 재판은 승리한다.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 중에 딸은 아버지의 친구가 유산으로 남긴 뮤직박스를 보게 된단다. 바로 이것이 판도라의 상자이자 블랙박스가 된 것이지.
박스를 열자마자 흘러나오는 오르골 음악소리. 그리고 천천히 보이는 아빠의 과거 나치 시절 사진
결국 딸은 이 사진을 증거자료로 법원에 보낸단다.
정의, 정직, 가족애 사이에서 그녀의 고통스러운 선택과 눈물.
아름답기만 한 음악소리.
처절한 결말.
삶은 때때로 이런 극적인 대조를 이루며 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너희들이 이것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리겠지?
여기서 하나 더
공자는 논어에서 정직을 뭐라고 설명한 지 아니?
혈육의 사랑은 인을 바탕으로 하기에 정직도 덕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한단다.
섭공이 공자에게 말하길
우리 고장에 마음이 곧고 바른 사람이 있는데 그 아비가 양을 훔치자 아들로서 스스로 고발하였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우리 고장의 곧은 사람은 그와 같지 아니하다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하여 숨기고
진실로 곧음이란 그 가운데 있다
영화 뮤직박스에서 나오는 정직과 논어에서 말하는 정직을 이해하겠니?
동양적인 가치관과 서구적인 가치관의 차이과 배경을 알아야 각각 다르게 접근하여 이해할 수 있단다.
그런 연후에 통합해서 바라볼 수 있단다.
또 정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왜 가족의 허물을 숨기고 덮어주는 것이 정직이며 가족애를 품고 아프지만 정의로 나가는 것이 정직인지 사유해봐야 할 주제이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의와 공의를 지키기 위한 정의. 이것 사이에서도 차이점이 분명 있단다.
너희들이 살면서 답을 얻어가면 좋겠다. 여기에 공부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엄마도 인생을 살아내고 있는 과정이라 뭐라 답하기 어렵다. 답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행함으로 연결하기 힘든 문제란다
나는 너희들을 믿는다.
지금은 경쾌하고 신나는 오르골 소리에 즐겁게 몸을 실룩거리는 천진함으로 춤만 출지라도
훗날 바른 생각을 가지고 치열한 전쟁터 같은 이 세상에서
뚜껑을 열면 비밀스러운 추억과 보배 같은 진리가 연주되는 오르골을 선물해줄 수 있는 정의로운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을!
- 박물관 60주년 기념으로 파리 경매시장에서 무려 720,000유로를 주고 구매한 왕실 시계 제조자 Charles Clay의 명작. 새로 리모델링이 된 오르골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