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9 저녁묵상
미련한 계집이 떠들며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자기 집 문에 앉으며 성읍 높은 곳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자기 길을 바로 가는 행객을 불러 이르되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도적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 하는도다 오직 그 어리석은 자는 죽은 자가 그의 곳에 있는 것과 그의 객들이 음부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잠언 9:13-18 KRV
8장의 시작과 9장의 시작은 대구를 이루는 구조였죠. 9장의. 마지막 역시 이에 대응하는 구조입니다.
8장 - 지혜가 성문 위에 오릅니다.
9장 전반 - 지혜의 여종이 오릅니다.
9장 후반 - 미련한 계집이 오릅니다.
8장 - 지혜롭지 못한 사람을 꾸짖습니다.
9장 전반 - 지혜롭지 못한 사람을 타이릅니다.
9장 후반 - 자기 갈 길 잘 가고 있는 사람을 부릅니다. 또 지혜 없는 사람도 부릅니다.
8, 9장 전반 - 지혜롭지 못한 사람에게 지혜를 가지라 합니다.
9장 후반 - 가관입니다.
자기 갈 길 잘 가는 사람에게 "어리석은 자여, 이리로 돌이키라."라고 하며 악으로 인도합니다. 또한 지혜 없는 자에게는 악행의 달콤함을 설파합니다.
잠언을 읽다가 처음으로 솔로몬의 필력 그 자체에 감탄했습니다. 구조를 어떻게 이렇게 설계할 수 있을까요?
지혜와 그의 여종, 악한 여인은 같은 곳에 올라 같은 행위(소리침)를 합니다. 하지만 전달하는 메시지가 전혀 다르죠. 지혜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지만 악한 계집은 사람을 음부 깊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앞서 지혜란 곧 하나님의 권능이자 일부로 이해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생명의 길로 이어집니다. 반면 악인이 행하는 일은 멀쩡한 사람까지도 죽음의 길로 인도합니다.
여기에서 지혜의 역할이 부각되며, 동시에 앞서 호소했던 지혜의 정의를 되새기게 됩니다.
지혜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이며, 주를 경외하며 악으로부터 구분되는 것입니다.
9장 후반 말씀은 단순히 지혜와 상반된 악인의 행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메세지를 함축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혜를 간구하여 악을 구별하여 멀어지도록 하라."
지혜가 있어야지만 사망의 길로 인도하는 악을 떨쳐낼 수 있으니까요. 마냥 사례와 논리를 번갈아 제시하는것이 잠언의 구조인 줄 알았는데 이런 치밀한 은유가 담겨 있다니. 역시 솔로몬은 대단합니다. 믿고 보는 잠언입니다.
문학적인 구도가 가져오는 함축된 의미는 이쯤하고, 오늘 말씀 그 자체를 읽어보면 지혜와 반대되는 개념인 "어리석음"에 대한 고찰을 가져갈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정의한 어리석음은 이렇습니다.
1. 멀쩡한 사람을 악의 길로 물들이며
2. 악인을 더욱 부추기고
3. 죽음의 길 가운데에 있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셋 중 하나에라도 해당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1과 2는 세상에서 말하는 선악의 개념으로도 포섭이 가능하지만 3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무릇 주님의 자녀를 지칭하며, 새 사람으로 거듭나 주님을 경외하는 신도들은 위 사항에는 해당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잠언의 기준에서 어리석지는 않다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지혜롭다고 할 수는 없음을 깨닫고 경계해야 합니다.
8장에서 지혜는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할 사람"만을 대상으로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서 임하는 지혜라는 권능이 임재하지 않을테니까요.
지혜가 호소한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신도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할 일이며, 우리는 지혜를 허락해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리석지 않음이 지혜로움이 아닙니다.
하나님, 악의 길과 죽음의 길에 서 있지 않음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지혜를 소중히 생각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제 마음을 다듬어 주시고, 잠언의 지혜를 제게 허락하사 생명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