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과 달리 조금 캐쥬얼하게 옷을 입었다. 넥타이까지 매고 관광지 다니니까 정말 불편하더라. 아, 관광하러 다니겠다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정말이다. 라마다호텔의 서비스는 놀라웠다. 택시 문을 열고 인사를 해 주는 직원이 따로 있더라. 누가 갑자기 문을 열길래 깜짝 놀랐다. 촌놈 티를 냈다.
포스터 앞에서
필자의 두 번째 논문 발표를 위해 포스터를 부착했다. 정출연 분들이 역시 많더라. 둘째 날에도 카이스트 전자과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발표자가 어디 도망갔나보다. 인사라도 나누고 싶었는데 끝내 만나지 못했다.
필자가 치즈케익스튜디오때 만들었던, 음원에서 MR만 분리하는 프리프로세서를 만들려고 노력하시는 에트리 박사님이 계셨다. 이번에는 그 전 단계 모델로 음성과 반주를 구분하는 classifier를 만드셨는데 필자가 했던 삽질을 다 알려드렸다. 마음껏 스쿱해 가셔서 좋은 기술을 만들어 주시길.
돌아다니다 보니 심장 CT사진이 걸려있길래 너무 반가워서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필자의 졸업논문이 심장 CT사진에서 관상동맥만을 표지하는 semantic segmentation AI였다. 이를 통해 관상동맥 협착증이 있는지를 진단할 수 있고, 스텐트 삽입수술이 반드시 필요한지 혹은 약물치료로 족한지를 진단할 수 있게 된다.
"제가 2년전에 석사논문으로 말이죠!"
UST 연구팀이었다. 병원과 바로 협업해서 데이터를 받아오고 있더라. 그게 너무 부러웠다.
"그런데 칼슘이 구분이 되나요? 조영제랑 똑같이 새하얗게 나오지 않나요? 프리프로세싱 단에서 제거하는 거에요? 아니면 칼슘이 있어도 robust하게 나와요?"
"아, 저희 데이터는 조영제 안 먹고 찍은 데이터라서 칼슘은 걸러낼 수 있습니다."
"와, 저는 조영제 먹은 환자 데이터라서 진짜 별 짓을 다 했는데요. Histogram stretch도 사용해 보고."
"저희는 그런 걸 잘 못 해서요. 허허."
"너무 겸손하신 것 아닌가요? 그런데 데이터는 정말 부럽습니다. 저는 IRB때문에 저널에 논문도 못 냈어요."
투 머치 토킹 해버렸다. 재밌었다.
키스티에서는 시뮬레이션 위탁 플랫폼을 내놨다. 무료로 키스티의 서버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릴 수 있는 서비스다.
"그런데 연산 속도가 느려요."
"퇴근할때 걸어놓고 갈 수 있다는게 어디입니까?"
"그건 그렇죠."
"그런데 제가 만든 모델을 올려서 시뮬레이션 할 수도 있나요?"
"어, 그건 말이죠."
첫째날에 비해 여기저기 질문할 만한 거리들이 많아서 좋았다. 학회 오기를 잘했다. 막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고 있다기보다는 어플리케이션을 정말 영리하게 잘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기분이 좋았다. 농업도 사실 되게 이상한 응용분야이지 않은가. 거의 모든 분야에서 이제는 딥러닝을 쓰는데, 갇힌 생각을 조금 벗어날 기회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포스터세션 다음으로 있는 오전 세션은 잠시 듣고 탈주하기로 했다. 필자의 관심사에 맞는 기술이 단 한 건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디 조용한 데 내려가서 글이나 쓰기로 했다.
미술식당
근처 카페라도 가서 시간을 죽이려고 했는데, 라마다호텔 1층에 미술식당이라는 곳이 있더라. 여기는 원래 중식당이었는데 리모델링을 하기보다는 이 곳을 그대로 갤러리로 재오픈했다고. 시민에게 오픈된 미술 전시 공간이다.
홀
홀이었던 곳은 테이블이 오픈되어 있었다. 마음껏 앉아서 쉬다 갈 수 있고 콘센트도 작동이 된다. 갤러리를 한 바퀴 둘러보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제목은 뭐가 좋을까? 학회에 가고 싶었던 공익 정도면 적당하겠지?"
방명록도 남겼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학회 밥을 구경이라도 해 보고 싶었기에 식당을 방문했다. 학회 등록시 받았던 점심 쿠폰을 제출하면 입장할 수 있다.
전복갈비탕
식사로는 전복갈비탕이 나왔다. 갈비와 전복만 대충 건져먹고 식사를 마무리했다. 다이어트 중이라서 밥까지 말아 먹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웠다. 식사도 끝났고, 오후 세션 중 마음에 드는건 키노트 뿐인데 키노트까지는 세 시간 가량이나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뭐다? 탈주다!
신났다
학회장 근처에 용연계곡과 용두암이 있었다. 너무 신났다. 해안가를 따라 걸어가며 관광을 즐길 수 있는 코스다. 편한 옷을 입고 오기를 잘했다. 그리고 화구통은 너무 걸리적거렸다.
용연계곡은 용이 누워있다가 승천했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라고 어디서 들은 것 같다. 필자는 대체 이런걸 왜 알고 있을까? 언제 습득한 지식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경치가 정말로 아름다웠다. 용두암은 어린 시절 와서도 별 감흥을 못 받았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키노트 스피치
키노트는 모두 챙겨들었다. IEEE Communication Society의 president인, 홍콩과기대의 Khaled B. Letaief 교수님 키노트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강의 잘 하시더라. 모르는 분야인데도 쏙쏙 이해된다. 5G가 아직 상용화 걸음마단계임에도 불구하고 6G기술 연구를 위한 로드맵은 이미 완성되어 있더라. 2020년에 5G의 현실적 상용화가 있을 예정이라면, 6G는 2030년쯤 상용화가 될 것 같다는 전망이다. 그쯤 되면 실시간 홀로그램 영상 전송 따위가 가능해질 것이며, 세상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다.
5G가 통신공학계에서 가지는 위상이 얼마나 높은지를 체감할 수 있는 기회기도 했다. 필자의 5G폰은 전파가 터지지도 않지만, 이건 방만한 마케팅을 펼친 통신사의 책임이지 기술 자체는 노블하고 훌륭한 것 같다.
키노트 뒤에는 뱅큇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다이어트중이므로 라마다호텔에서 라마단을 실시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친구가 한 마디 한다.
현자
그렇다. 라마단은 해 지면 폭식하는 거다. 그래, 라마단을 하기로 결심했으니 마무리까지 라마단식으로 확실히 해야지. 헤헤.
ICTC 10주년 행사가 진행되는 중
ICTC는 올해로 10주년을 맞는 행사다 보니 이런저런 행사가 많았다. 높으신 분들이 와서 연설하는 동안 필자는 세팅 중인 음식을 구경했다. 이번 학회에 제출된 논문들 중 대충 40%가량이 합격했다고. 필자는 이번에 논문 두 편 모두 붙었다. 흠흠. 필자는 공학자가 맞다는 뜻이다. 흠흠.
세팅중인 음식
여기저기서 음식 담긴 카트가 오가고 셰프 형님들이 바쁘게 뛰어다니시더라. 좋다. 다 좋은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빈 테이블에 랜덤으로 앉는 식이었는데 필자가 앉은 테이블은 정출연에서 오신 분들이 우르르 앉아 계셨다. 축배를 위해 한 테이블당 와인이 한 병씩 놓여 있었는데, 이 할아버지들이 자기들끼리 그걸 다 따라버리신게 아닌가. 우쒸. 필자도 와인 먹을 줄 안단 말이다. 필자를 비롯해 늦게 앉은 백형, 백누나들이 몹시 당황했다. 사람이 말이야, 예의가 있어야지 말이다. 우리때는 저런 일은 상상도 못 하는데. 옛날에는 저래도 됐나보지? 나때는 말이야! 어! 저런 건 다 같이 조금씩 나눠 먹고 더 필요한 사람한테 추가로 따라주고 그런다고! 어!
이런 불합리에 굴복한 필자였다면 애초에 코딩하는공익이라는 이름 자체가 알려지지 않았겠지. 침착하게 옆 테이블로 다가가 사정을 설명하고 와인을 구걸해 왔다.
전리품
하, 향긋하다. 꽃다발을 손에 쥔 것 같다. 이런 걸 자기들끼리 먹으려고 했다고? 너무하다. 옆 자리의 백형에게도 와인이 필요하냐고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하셨다. 그 분은 정출연 분들의 행태에도 당황하고, 내 행동에도 추가로 당황하셔서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아무렴 어떤가. 와인은 맛만 좋더라.
"이거 혹시 물입니까?"
백형이 한라산 소주병을 가리키며 물어봤다. 오우.
"아니, 일종의 한국식 보드카 같은거야. 독한 술."
덕분에 대화가 트였다. 사교성이 좋은 형님이다.
"그렇구나. 물은 어디서 먹지?"
"손을 들어올리고 따라 달라고 하면 될걸?"
"아아 고마워. 그런데 네 로스트비프 맛있어 보인다. 어디서 가져왔어?"
"저기서. 네 연어도 맛있어 보이는데?"
"연어는 저기서 가져왔어. 아마 서로 다른 코스들이 준비되어 있나본데?"
"좋았어. 나는 이번에 연어를 멸종시키고 돌아가야겠어."
연어를 잔뜩 담아서 돌아왔다. 백형이 또 말을 건다.
"그런데 너는 어느 대학 학생이야?"
"아 난 학생은 아니고, 병역의 의무 수행중이야."
"아 그래? 총 쏠 줄 알아?"
"20초만 주면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도 할 수 있어."
여기서 그 형님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럼 군사적으로 활용할 기술을 보러 온거야? 멋지다."
"아니, 나 논문 두 개 발표했는데?"
백형의 2차 멘붕.
"아 그럼 밀리터리 테크놀로지를 발표한거야?"
"노! 어그리컬쳐(농업)!"
여기서 그 형님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하지만 사교성이 워낙 뛰어나신 분이라 그런지 금새 정신을 차리고 다시 질문을 해 오셨다.
"아, 농업분야면 바이오테크놀로지 쪽이야? 멋지다!"
"아니, 인공지능!"
백형의 3차멘붕. 이 형님 놀리는게 왜이렇게 재미있냐.
"넌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한때 육군 솔져가 되기 위한 캠프에 있었어. 거기서 200명의 훈련병을 지위하는 커맨더였지. 지금은 대한민국의 고용시장과 노동자 권익을 위하는 정부 브랜치에서 밀리터리 서비스를 하고 있어."
"뭐야 그게. 연구는 왜 해?"
"그러게 말이야. 근데 그거 알아?"
"뭔데?"
"대한민국 남성의 90% 이상은 총 쏠 줄도 알고 수류탄을 던질 줄도 알아. 전쟁중인 국가에 방문한 걸 환영해. 아, 안전은 걱정하지 마. 나처럼 군사훈련을 받은 남자들이 도처에 깔려있거든. 이 연회장 안의 사람 중 80% 이상은 군사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어. 너의 안전을 지켜줄게."
밥 다 먹고 헤어질때까지 그 백형은 더이상 누구에게도 말을 걸지 않았다. 꺄르륵.
와인 먹고 알딸딸하니 좋았다. 바닷바람 받으면서 해안가 걷는 맛이 있었다. 바다 보니 뛰어들어서 수영하고 싶다. 자유형 100미터쯤 하다가 접영 어푸어푸 하고 싶었다. 숙소에 대충 짐을 던져놓고 다시 기어나왔다. 약간 취해 어질어질한 머리로 여행 기분을 만끽했다.
"아, 운전하고 싶다. 술은 괜히 먹었네 정말."
뒤늦게 후회를 하며 주위를 살펴봤다. 숙소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관광지는 제주목 관아. 사또님 계시던 그 관아가 맞다. 터덜터덜 걸어서 도착했더니 관람시간이 끝나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정자에 가서 누웠다.
정자에서 보인 풍경
외지에 와서 정자에 누워 있으니 절로 풍류가 차올랐다. 그래, 이게 바로 여유라는 거지. 필자가 왜 학회에 오고 싶었는지 알게 되었다. 기술교류는 핑계고 사실은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역시 필자는 공무원은 시켜줘도 못 할 체질이다. 단기적인 성취감을 느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물이다. 필자는 말이다.
"내일은 학회 그냥 째야겠다."
마지막 남은 하루를 가장 필자에게 필요한 방향으로 소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대로 정자에 누워 잠시 깜빡 잠이 들었다. 정신이 들자마자 일어나 숙소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