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천하라는 사이트가 있었다. 과거형으로 적었다. 당시 운영자 김 선생님께서 군대 전역 이후 무언가 작업을 하다가 DB를 잘못 건드려서 사이트가 통째로 날아갔었거든. 나는 초등학교 5학년시절부터 이 사이트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남들이 만든 종이모형을 다운받아 만들기도 하고, 내가 만든 종이모형을 올리기도 하고. 초딩이다 보니 개념 없는 글도 많이 썼었네. 부끄럽다.
당시 만들어 올렸던 작품 중 하나
누군가 멋진 모델을 설계해서 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그걸 다운받아 종이로 만들곤 했었다. 초등학생 시절 종이모형 제작에 꽤나 심취했었다.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펼쳐보면 내 장래 희망이 '페이퍼 모델러'라고 적혀있다. 종이로 모형을 만드는 미술가다. 그래, 내 장래희망은 미술가였다.
그런데 이 사이트에는 소설을 연재하는 게시판이 있었다. 읽고 있다 보니 재밌는 글들이 많았다. 그때는 오리지널 작품 보다는 메이플스토리나 카트라이더처럼 잘 알려진 게임의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한 2차 창작물이 많았다.
아직도 기억나는 작품이 있다. 크레이지 아케이드 캐릭터들이 주인공이었다. 당시 넥슨과 계약한 공식 만화에서 배찌에게 먹보 기믹이 붙었었는데, 2차창작물에서도 이 설정이 유지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중 어린 시절 너무나도 충격을 받아 아직도 기억하는 부분을 기억나는대로 옮겨 보겠다.
"배찌야, 너 왜 화장실에서 밥을 먹고 있어?"
"화장실은 외부로부터 격리된 공간이므로 온전히 음식에 집중할 수 있지. 더군다나 숙성된 암모니아 냄새가 뇌를 자극하기 때문에 더더욱 맛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고."
어떻게 하면 저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 인터넷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여튼 나도 여기에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래서 당시 가장 좋아하던 게임인 환세취호전 캐릭터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연재했다.
환세취호전 오프닝
1997년도에 나온 게임이구나. 윈도우 xp에서 이 게임을 실행하려고 시도했더니 호환성 지원이 되지 않아서 실행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이 게임을 스마트폰에서 구동 성공한 영상도 있던데. 여튼 필자는 이 게임을 너무나도 좋아했다. 그래서 소설을 쓴 것이고.
처음 한 편의 글을 쓰기까지 정말 많은 고민과 용기가 필요했다. 등장인물의 성격을 정하는 것도 어렵고, 사람들의 싸늘한 반응이 두려웠다. 결국 용기를 내서 작은 손으로 볼마우스를 잡고 "게시"버튼을 눌렀던 그 순간, 작가로써의 내 인생이 막을 올렸다. 그날 이후로 나는 글 짓는 사람이 되었다.
반 년 가까이 종이천하 사이트에 글을 연재했다. 그리고 이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제본해서 방학숙제로 제출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나는 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교실을 굴러다니는 파본을 보며 이렇게 생각했었다.
"책이란 것은 종이를 실로 꿰메어 만드는 것이구나."
A4용지에 글을 인쇄하고 실로 꿰메어 내지를 완성했다.
표지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고생을 많이 했다. A4용지에 표지를 일단 컬러로 인쇄하고, 투명락카를 여러 번 뿌려서 종이 표면에 광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에 OHP 필름을 부착했다. 뭘로 부착했는지는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표지는 도저히 실로 꿰멜 수 없어 스테이플러를 일렬로 박아서 책을 완성했다.
12살때 만든 나의 첫 책
이 책이 아직도 온전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놀랍다. 16년 전에 만든 책인데 말이다. 우측 상단을 보면 표지의 OHP 필름과 A4용지가 분리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책의 뒷표지
뒷표지에 나름 책 소개도 기특하게 적어뒀었네. 책에 남겨진 얼룩이 세월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거 어디 진공포장해서 보존처리 하고 싶다.
우측을 잘 보자
아무래도 책 표지를 A4용지로 만들었다 보니 책의 크기가 A4용지보다 작아졌다. 책의 두께만큼 길이가 짧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의 우측 종이를 잘라냈다. 당시 칼질을 열심히 했지만 종이가 굉장히 단정치 못하게 잘렸다. 책의 글자가 붉은 색인 이유는 책을 인쇄하던 중 검은색 잉크가 모두 떨어졌기 때문이다. 나름 분량이 빵빵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