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딩하는 공익
문득 고시촌 시절이 떠오른다.
변리사 시험 학원에서는 법학 강사를 '교수'라는 거창한 칭호로 부른다. 비록 사법시험에 낙방했더라도, 혹은 박사학위가 없더라도 교수가 될 수 있는 신기한 공간이다. 그러면서도 정작 시험에 합격한 현업 변리사는 교수가 아니라 강사라고 부른다.
당시 민사소송법 교수님은 석사학위를 소지했고 박사과정을 갓 수료한 상태였다. 수료란 졸업을 하는데 필요한 학점을 모두 채웠다는 의미고, 학위 취득은 이와 별개로 논문을 써서 심사를 통과한 학자에게 주어지는 영예다. 아직 석사에 불과한 그는 남들이 박사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그가 저술에 기여한 서적이 있는데, 머리말에서 저자는 그를 콕 집어 석사라고 칭했다. 교수님은 여기에 불만이 많았다. 교수님 본인은 사법고시에 낙방했지만 사시 합격자와 변리사시험 합격자를 수도 없이 배출한 신기한 사람이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다.
"수험생에게 있어서 판례는 실탄과도 같습니다."
판례는 법정에서의 판결 사례 또는 선례다. 특히나 대법원의 판례는 법률 해석의 모범답안과도 같기 때문에 중요하다. 전쟁에서 탄약이 많이 필요하듯이 수험생들은 평소에 판례를 열심히 공부해 수험장에 최대한 많은 실탄을 가지고 들어가라는 이야기였다. 글을 적다 보니 갑자기 고시 시절 이야기도 연재해 보고 싶어 졌다.
예술가에게는 경험이 곧 실탄이 아닐까.
아직 어떠한 경지에도 이르지 못 한 필자가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무튼 필자는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어 혈안이 된 사람이다. 스스로를 예술가 또는 작가로 정의하기 훨씬 전부터. 그래, 어린 시절부터 그랬다. 온갖 기행을 일삼는 삶을 살아온 것이다.
필자의 흑역사 중에서 특이한 것만 엄선해 글로 써도 책이 몇 권은 나올 것 같다. 무튼 필자는 지금까지 해 보지 않은 새로운 경험을 할 기회가 온다면 그걸 거의 놓치지 않는 편이다. 이렇게 살아온 세월이 20년이 넘는다. 그 경험들이 하나 둘 차곡차곡 쌓여서 지금의 필자를 만들었다. 가치관도, 실력도.
이번 행안부에서의 요청도 같은 이유로 수락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 혁신을 논의하는 자리가 궁금했다. 운이 좋으면 글감도 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막상 출장을 다녀왔음에도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별로 생기지 않았다.
왜 그럴까. 그다지 주변에 공감을 사고 싶은 마음이 일지 않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건 또 왜일까. KCD2019와 달리 청중과 교감이 거의 없었기 때문 아닐까.
그것뿐일까. KCD때는 재미요소를 잔뜩 집어넣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들었어도 강연이 재미가 없었을 것 같다.
이래저래 이번 강연은 필자의 취향과 거리가 있었다.
이번 행사는 천안시에 있는 우정공무원 교육원에서 실시됐다. 우체국에서 일하게 될 신규 공무원들은 여기에서 연수를 받는다고 한다. 위치도 아주 좋다. 톨게이트 바로 옆이다. 아무래도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다 보니 이 곳으로 장소를 선정한 것 같다. 행사 하루 전 날 인터넷에 기사가 나왔다.
세종시 고용노동부 출장은 혼자 다녀왔는데. 지난번 청와대 때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인솔 공무원과 함께 움직여야 했다. 운전이라도 번갈아 가면서 할 수 있으면 좀 나을 텐데 관용차가 아니라서 그러지도 못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운전을 좋아하기도 하고. 다음에도 출장 갈 일이 생기면 필자의 차로 다녀오고 싶다. 주무관님은 조수석에 태우고 말이다. 도착 시간이 애매해서 점심도 못 먹고 회장에 들어갔다. 샌드위치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으나 손을 대지 않았다. 아픈 사람이 힘들게 멀리 출장 왔는데 이왕이면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기에.
행정안전부 차관님이 먼저 강연을 하셨고 필자는 그다음 차례였다.
강연을 듣는 분들은 전국에서 모인 혁신담당관이다. 과장급(주로 4급)이 대부분이라고 전해 들었다. 아마 필자의 강연 내용이 급진적으로 보여 불편했던 분들도 분명히 계실 것이다. 하지만 혁신의 본질을 이해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재미있게 들으셨으리라 생각한다.
혁신은 준비기간이 오래 걸릴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성과는 굉장히 단기간에 터뜨릴 수 있어야 한다. 갑작스레 많은 것이 바뀌기 때문에 혁신이라고 부르는 것이거든. 속도가 느린 변화는 개선이라 부르면 족하다. 혁신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무게감은 결코 가볍지 않다.
발표가 끝나자마자 회장을 떠났다. 함께 간 주무관님은 한 시간 반 동안 심심하셨을 것이다.
"점심 어떻게 하지?"
"그 맛있다던 만두전골 맛집 어때요?"
"거기 줄을 한 시간은 서야 될 것 같아."
"그러면 고속도로 휴게소 갑시다."
"어? 혹시 냉면 먹을래?"
우정공무원 교육원에서 내려오자마자 보이는 곳에 새로 오픈한 냉면집이 있었다. 개업 이틀 차다. 주방 식기가 모두 번쩍번쩍 빛이 났다. 개업 기념이라며 시루떡과 물만두를 주셨다.
국물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이렇게 맛있는 냉면은 처음이었다.
이번 출장에서 들떠서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감흥이 있었던 유일한 것이 바로 이 냉면집이다. 다음에 여자 친구랑 와야겠다. 출장 오길 잘했다.
이날 몹시 피곤해서 수영은 안 갔다. 상상텃밭 이민우 이사 집에 놀러 가 필자가 유도한 방정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에 와서 누웠다. 카톡이 울렸다. 9급 공무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병현아 혹시 오늘 초과근무 이야기했어? 지금 모든 안건이 초과근무에 맞춰져 있어."
노동청 공익과 행안부 출장 (完) 은 신분상 추후에 공개합니다. 소집해제 이후 세창출판사를 통해 출간될 '코딩하는 공익' 책에 수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