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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창섭 Apr 02. 2019

눈물의 미덕

여느 대학에서나 1학년들에게 필수 과목으로 글쓰기가 지정되어 있는데, 경희대는 좀 특이하게 글쓰기1과 글쓰기2로 나누어져 있다. 즉 두 학기에 걸쳐 글쓰기를 이수해야 하는 것. 글쓰기1은 주로 자아의 내면을 탐색하기 위한 측면으로 설계되어 있고 글쓰기2는 보다 경계를 넓혀 사회 및 세계와의 접점을 찾는 측면으로 설계되어 있다.


저번 학기에는 글쓰기2를 맡아서 학생들이 관심이 많을 만한, 학력위계, 폴리아모리,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 적정기술 등의 이슈들을 다루었고, 이번 학기에는 글쓰기1을 맡아 3월 한 달 동안 자아 탐색을 위한 글쓰기가 왜 필요한지, 우리가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왔다.


그리고 오늘까지 교재에 제시된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대해 글을 써올 것을 첫번째 과제로 부여하였고, 수업 시간에 조원의 수만큼 인쇄해 오게 한 뒤, 돌려 읽게 하였다. 물론 나도 제출받아서 함께 읽고. 그리고는 가장 잘 썼다거나, 그 고통의 무게가 가장 무겁거나, 모든 인원이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은 글을 조별로 한 편씩 추천하게 함.  


사실 큰 기대는 없었다. 이자크 디네센의 말을 빌려, "이야기로 구성할 수 있거나,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면 그 고통은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된다."라고 학생들에게 이 과제에 대해 포장했지만, 갓 처음 보는 조원들에게 읽히게 되고, 게다가 추천 대상으로 선정되면 전혀 모르는 다른 학생들에게도 노출되는 나의 고통. 그 수위는 잔 위로 찰랑거릴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웬걸. 나는 울고 말았다. 학생들이 조원들끼리 글을 돌려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도 전체 학생들의 글을 읽으며 계속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리고 걱정을. 만약 이 글이, 그리고 저 글이 추천 대상으로 꼽힌다면 나는 멀쩡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이 글을 읽어 줄 수 있을까. 우려대로 각 조에서는 날 울먹이게 한 글들을 각기 추천하였고, 나는 대상자에게 이 글을 내가 모두에게 읽어주어도 되는지를 물은 뒤, 최대한 덤덤하게 글을 읽어주었다. 그러나 덤덤하지 못했다.


각 조가 추천한 7개의 글들 중 무려 4개의 글을 읽어주며 울먹였다. 아버지가 뇌졸증에 걸려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이야기, 작년에 간암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 왕따 가해자에서 피해자가 되어 버렸던 이야기, 정신 질환을 방치해 두었다가 대학 입학까지 2년을 미뤄야 했던 이야기 등은 건조한 목소리로 읽기 힘들었다. 종종 어떤 구절마다 호흡을 멈춰 눈물을 삼켜야 했고, 심지어는 눈물도 흘려 버렸다. 그런데 울고 있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고, 글을 쓴 학생도 듣고 있는 학생들도 다 같이 울고 마는, 강의실은 눈물의 공간이 되었다.


사실 강의실에서 눈물을 흘려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재작년 초여름, 그리고 작년 4월, 416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학생들에게 눈물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학생들과, 그것도 복수의 학생들과 울어본 적은 없었다. 무척이나 묘하고도 귀한 경험. 함께 운다는 것은 최소한의 심리적 연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동그란 눈물자욱은 그 눈물자욱을 함께 그린 사람들 둘레로 동그란 선을 하나 그어준다.


간암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눈물을 흘리며 읽은 후, 그 글을 쓴 이에게 잠깐 기분을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글을 쓸 때는 온전히 내 이야기로서 글을 쓴 것인데, 그것을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들으니까, 마치 내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고. 꼭 다른 사람의 경험을 들으면서 내가 슬퍼하고 있는 것 같다고.


어쩌면 나의 경험을 이야기를 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의 가치는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의 경험과 생각이 외부화된다는 것. 즉 거리두기가 가능해지고, 나는 또 하나의 나와 대화가 가능해진다. 어쩌면 우리가 글을 쓰면서 느끼는 해방감은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게다가 이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듣게 되면 그 외부성이 더욱 가시화되고 명시화된다. 나의 글을 나의 눈으로 읽는 것과는 또다른 가치가 부여된다. 글의 화자의 정체가 잠시 감춰지는 대신, 말을 하고 있는 화자의 정체가 더욱 부각되는 까닭이다.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가 되고, 너의 이야기가 된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안의 어떤 부분과 연결점을 찾는다. 내가 쓴 글이 다른 이의 경험처럼 되어 실제 나의 경험과 연결되는 순간.


그 학생이 무슨 의도로 그 말을 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렇게 해석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가 함께 흘린 눈물이 조금 더 빛날 것 같다.


한바탕 운 후 우리는 약속을 했다. 아니 나는 약속을 했다. 울었으니 다음 번 글 쓴 후에는 웃어보자고. 다음 글쓰기 과제로 부여할 주제는 밝고 재밌는 것으로 하겠다고. 그리고 4월 초에는 햇살도 좋으니 잔디밭에 같이 나가자고 약속을 했다. 글쓰기 수업의 미덕들이다.



-2016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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