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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창섭 Mar 23. 2020

희망이 가장 무서운 것일지라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상자를 열고, 그러자 세상의 모든 재앙과 질병이 쏟아져 나온다. 놀란 나머지 판도라는 그 상자를 닫았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재앙과 질병이 생기게 된 연유이다. 그러나 급하게 닫은 상자 안에는 그나마 희망이 남아 있었고, 그래서 인간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희망은 잃지 않게 되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 다시 읽은 판도라의 상자 설화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마무리가 긍정적인 메시지가 아니었다. 희망이 왜 온갖 재앙과 질병이 들어 있는 상자에 함께 담겨 있었던 것인가? 이것은 희망 역시 재앙이자 질병이란 것 아닌가? 그리고 미처 날아가 버리지 못하고 늦어버린, 그 무게가 가장 무거운 재앙, 어쩌면 인간에게 가장 무겁고 무서운 재앙은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고작 33년 반을 살았지만 살다보니 점점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희망을 말할 때 누군가가 희망을 말할 때 그 희망의 색이 점점 희미해 보이고 무소용한 수사로 보이게 되는 것을 우리는 쉽게 닳고닳아 간다 라는 말로 명명하는 듯하다. 지지했던 많은 투쟁들은 스러졌고 갈망했던 많은 변화들은 이뤄지지 않았다. 옳다고 해서 행해지는 것은 아니었고 행해진다고 해서 변화하는 것은 아니었다. 돌멩이에 걸리지도 않았는데 우린 쉽게 넘어졌다. 희망이 무거운 것일수록.


하지만 여전히 희망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나온다. 끝까지 넘어지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눈물이 나온다. 현재가 가슴 아파서가 아니다. 미래가 가슴 아파서다. 저들도 결국 넘어질까봐. 그들에게도 역시 희망이 가장 큰 재앙이 되어버릴까봐. 힘내세요라는 말도 쉽게 나오지 않는다. 힘낸 만큼 달라지는 것이 없을까봐.


그래도 저기에는 사람이 있다. 희망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 정도 보상과 이 정도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고 끝끝내 자신들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식을 버리고 돈을 선택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동물 중에서 인간만이 택할 수 있는 선택일 것이다. 그러니 인간을 버리고, 그렇지만 정신은 잃지 않고, 울부짖지 않고 의연하게 거기에 서있는, 인간도 아닌 동물도 아닌 사람들이 있다. 초인들이 저기에 있다.


그 극한의 슬픔도 내것이 아니고 그 극한의 의지도 내것이 아니기에, 난 그들을 절반도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함께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는, 그 희망을 함께 가져주는 것이다. 그 재앙같은 희망을 함께 가져주는 것이다. 그 희망에 힘을 보태는 것이다.


또다시 희망은 재앙이 되어 그들과 우리를 배신할지도 모른다. 나 한 명 광장에 더 나간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나아지는 것도 없다. 아마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광장에 나가는 것은 함께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재앙 중의 으뜸이 희망이라면, 그 재앙을 위로하는 것의 으뜸은 "함께" 아니겠는가.


혹시 또 모를 일이다. 그 함께의 크기가 커지면 희망이 재앙이 아닌 것이 될 수 있을지도. 이것 역시 또 하나의 재앙같은 희망일지나. 그러나 혹여 그 희망이 재앙이 될지라도 희망이 또 배신하더라도 그 재앙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는 장치를 우린 마련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 순간에 함께였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 그래서 또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또 누군가에게 어떤 재앙이 닥치면 나 역시 함께해 줄 수 있다는 것. 희망을 넘어 위로와 약속의 연대를 만들어 가는 것. 이것은 동시동소에 "함께"가 아니라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저기에 사람이 있다. 어디에나 사람이 있었다. 세월호에도 광화문에도, 삼성전자 공장에도 서비스센터에도, 기륭전자에도 쌍용자동차에도, 대학 화장실에도 대학 강의실에도, 밀양에도, 어디에나 사람이 있다. 사람을 만나러 가자.


오늘 3시 서울광장, 그리고 언제 어디라도.
때로는 희망이 재앙이 아니라는 약속을 할 수 있어야 우리가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 2014. 0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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