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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창섭 Mar 23. 2020

이것도 슬픔이라면

근 10년 동안 장례를 다섯 번을 치뤘다. 외할머니, 할머니, 큰아버지, 그리고 두 분 할아버지 순이었다. 친가 쪽은 흥미롭게도 세 분 모두 폐와 관련이 있었다. 두 분이 폐암이었고 한 분도 암이 폐로 전이가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가의 흡연자들 중 담배를 끊는 사람은 없었다. 오랜 흡연자인 아버지는 작년에 크게 앓으신 후 끊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으나 엄마도 몰래 나도 몰래 피우고 계실지는 모를 일이다.  

또 하나의 폐암 환자이던 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전화가 지금 막 왔다. 올해를 넘기기 쉽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는 이미 들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담배를 한 대 입에 문다. 빨다가 금방 비벼 끈다. 아무 맛도 잘 안 나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 오래 담배를 펴 왔고 너무 자주 담배를 끊어 왔다. 이를 다시 끊게 된다면 아마 담배 안 끊으면 뽀뽀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애인이 생기는 때이겠지.


나는 지금 당장 내려가지 못하고 조금 멘붕 중이다. 슬픔의 크기보다 여러 가지 일정이 꼬인 것에 대한 멘붕이 더 크다. 당장 새국어생활에 투고해야 할 글을 마감해야 하고, 다음 주 월요일에는 함양을 들러 거제로 방언조사를 가려 했다. 그리고 나는 장지가 산청이니 거제 가는 길이므로 지금이라도 짐을 꾸려서 차를 몰고 내려갈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좀 무리한 일정이다. 고양이 구월이를 어찌 해야 할지에도 변경이 필요할 수 있는 탓이다.


소말리아에서 기아 수백명이 죽어 가도 내 강아지 한 마리 죽는 것이 더 슬프다고들 한다. 고통의 시원지는 오감으로 체험 가능한 영역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삼촌이 돌아가신 것보다 지금 내 일정이 꼬인 당황스러움이 더 큰 나는 어느샌가 삼촌을 내 바운더리 밖으로 밀어낸 것이구나 싶다. 아니면 내 스스로 걸어 나왔거나. 이것을 쉽게 불효나 패륜이라 부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이를 성장이라고도 부른다. 나는 이런 식으로 성장해 왔구나. 그렇구나. 난 다 자랐구나.


나는 지금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당장 준비를 해서 차를 몰고 내려가야 할지, 마감부터 일단 끝내야 할지, 내일 내려가기 위한 차편부터 끊어야 할지, 세수를 해야 할지, 이부터 닦을지, 설거지를 먼저 할지, 인스타그램이나 한 바퀴 돌아볼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어쩌면 아무것도 못하는 채로 며칠이 흐를지도. 엉망이다.


기억이 떠오르길, 나는 삼촌이 울산에서 일을 할 때 몇년을 삼촌과 한 방을 썼다. 같은 벽에 쌓여 같은 천장을 보다 같은 이불 안에서 잠이 들었었다. 그래서 삼촌이 싫었다. 그래서 지금 덜 슬픈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냥 삼촌이 싫었다고 해 두자. 그게 낫다. 나는 가끔 이런 식으로 자위를 한다. 자위 말고... 누군가 당황스러움이란 것도 슬픔의 한 변이형이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지금 내가 너무 싫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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