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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창섭 Dec 19. 2018

제 가족이세요? 괜찮으세요?

- 김소연 詩, “식구들”,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에 대해

밥을 주던 길냥이가 어느날부터인가 새끼 세 마리를 동반하고 출몰한다. 그 녀석을 처음 보았을 때가 기억이 날 정도로 하나와 그 셋은 똑 닮았다. 다른 고양이를 집에 들이게 될지라도 그들의 밥을 챙겨줄 터이니, 반가움과 동시에 부담도 조금 커졌다. 사료 봉지가 가벼워지는 속도가 몇 배로 빠르다. 오늘 어머니와 함께 길을 나서는 길에 마치 비틀즈의 횡단보도 컷과 같이 넷이 일렬로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CAT, cat, cat, cat,


존 레논이 떠나고 조지 해리슨이 떠난 것처럼, 이들도 아마 하나하나 그 간격들이 멀어지겠지. 한 번 같은 신호를 받았다고 해서 다음 신호에서도 함께 녹색불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몇 개월이 지날 때마다 내가 볼 수 있는 그들 가족은 매번 다른 가족일 수도 있다. 성장은 영역을 만드는 일이다. 아마 그들도 그럴 것이다. 영역이 생긴다는 것은 거리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미 이해한 세계는 떠나야 한다 마치 고향처럼

이미 이해한 사람을 떠나듯이 마치 부모처럼" (김소연 詩, 식구들 中)



그 영역이 좁아지는 순간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태어남이나 죽음 때문일 것이다. 가족이란 명명을 하기 좋아지는 순간이다. 결혼식장에 가서 친척들을 만난다. 여기에는 신랑과 신부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더 많은 친족 호칭들을 거래하며 새로운 가족이 탄생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돈이 저기에 있다. 그리고 친족이라 불리던 사람들은 내부 관계들의 구성을 다시금 복습한다. “네가 누구 집 몇째였더라.”, “네가 결혼을 했더라, 안 했더라.” 그리고 우리 누나의 배에는 빛깔 한줌을 손에 쥐어 보기도 전에 이름과 가족부터 부여받는 배아와 태아의 그 사이가 존재한다. 축하로 들뜬 사람들.


그러면서도 어른들이라서 우린, 탄생만큼이나 죽음을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맞으며 우리는 함께 같은 옷을 입는다. 3일 동안의 가족수련회다. 가족의 구성은 금세 이그러지고 금세 다시 차오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죽음도 새로운 가족을 탄생시킨다. 없어짐도 생겨남을 만든다. 장례식장은 가족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장소이다. 그래서 가족의 행사라는 것은 대개 가족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는 순간이다. 축하하며, 위로하며, 또 웃으며, 울며,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그건 난 이제 더 이상 그 누구의 손자도 아닌 대신 그 누군가의 삼촌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매번 다시 탄생한다. 어찌 보면 식구랑은 다른 문제다. 

가족(家族)에게는 집이 있고 식구(食口)에게는 밥이 있다.

나는 집도 밥도 좋지만, 때론 집도 밥도 무서울 때가 있다.



“다른 꽃이 피었던 자리에서 피는 꽃

다른 사람이 죽었던 자리에서 사는 한가족

몇 사람을 더 견디려고 몇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장소뿐이었지만

어느새 우리들 기억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김소연 詩,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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