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창섭 Dec 23. 2018

연애의 탄생

- 2012, 10월


한국에서 사용되는 '연애'라는 말의 기원도 이 일본의 번역어에 있다.

1910년대 초반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이 어휘는 1920년대 초반에 이르면 폭발적인 유행어로 자리 잡는다. 대대적인 유행어로 대두되기 이전까지 '연애'는 '애'(愛)', '애정'(愛情), '친애'(親愛), '상사'(相思) 등의 어휘들과 경쟁해야 했다. 이 가운데 '연애'와 가장 가까운 뜻으로 사용된 우리말은 '사랑'과 '상사(相思)'였던 듯하다. 그러나 '상사(相思)'는 '연애'가 세력을 확대하면서 점차 용례가 줄어들었거, 1920년대에 이르면 '연애'와 '사랑'이 남녀 간 열정을 가리키는 데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가 된다. '사랑'이 신에 대한 애정이나 모성애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의미를 가졌음을 고려하면, '연애'는 남녀 간의 애정을 독립시켜 일반화시킨 독보적인 어휘였다.

엄격한 유교 이념의 지배 아래 있던 조선 사회에서 성과 사랑은 공적 담론에서 언급되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성이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점잖지 못한 행위로 간주되었던 문화적 풍토 안에서, 이성에 대한 열정이 담론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다. 그런데 새로운 어휘의 생경함은 성과 열정을 이야기하는 데 수반되는 거부감을 줄여 준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자주 쓰지 않았던 '연애'라는 말이 유력한 후보로 부상한 것이다. '연애'라는 신조어는 새로운 사랑의 형식에 대한 동경과 열망을 결집하면서, 비공식 영역 아래 숨어 있던 사랑의 열정을 공공의 것으로 담론화하는 전략적 장치가 될 수 있었다.

김지영(2012), '연애'란 무엇이었는가, 새국어생활 22-2, 국립국어원. 중에서.


흥미롭다. '상사'는 거의 '상사병'의 구성요소로만 살아남았는데, 이 얼마나 추상적이면서도 추상적이기에 낭만적인 말인가. '서로를 생각함'이라니. 그런 면에서 지금 사용되는 '상사병'의 기의는 기표의 구성요소들을 약간 왜곡하고 있다. 지금은 '상(相)'의 의미가 '상사병'의 기의를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엄격한 유교 이념 덕에 생경한 어휘인 '연애'가 세력을 얻었다는 점은 순간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뭔가 부족한 설명이라는 느낌도 든다.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계속 지배하였다면 '상사'라는 더 추상적이고 간접적인 어휘쪽을 더 선택했을 지도 모를 일, '연애'는 생경한 어휘일지언정 각각 한자 구성요소들은 훨씬 더 직설적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당시 '상사'보다 '연애'쪽을 택하게 된 것은 '상사'라는 말에 어려 있는 근원적 슬픔때문 아니었을까. 서로를 생각함은 서로를 볼 수는 없음을 함축하고 서로를 볼 수 없음은 사랑의 영역 내에서는 슬픔이므로. 긍정적이고 신선한 에너지로서 무언가의 어휘를 찾으려 하는 상황에서는 부적절한 어휘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고통의 교집합이 합집합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