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아란 Jan 09. 2020

지진나자 본인 집에서 자고 가라는 직장 상사

대학 교직원의 사회생활




때는 2016년 9월, 추석 연휴를 앞두고 경주에 두 차례 5.1과 5.8의 지진이 강타했다. 첫 지진이 왔을 때는 운전 중이었고, 두 번째 지진은 집에 혼자 있었다. 미친듯이 집이 흔들렸고 창문이 깨지기 직전까지 파바밧 떨렸다. 이후에도 여진이 계속되었고, 밤 사이 또 강진이 오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을 움켜안고 겨우 잠들었다.


지진 다음날, 추석연휴가 지나고 일주일 뒤 더 큰 지진이 올 거라는 둥 온갖 루머가 난무했다. 그런 와중에 직장 상사는 탕비실에서 혼자 커피를 내리고 있던 내게 슬며시 와서 이렇게 말했다.


“OO쌤, 다음주에 더 큰 지진이 온다는데 우리 집에서 그냥 자고 가소”

- “네?”




“다음주에   지진 온다는데 우리집에서 그냥 자고 가소”


우리 아버지와 같은 나이였던 상사는 웃으며 말했다. 그게 재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너무너무 화가나고 어이가 없는데 쏘아붙일 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겨우 나온 말이 ‘우리집은 주택이라 더 안전한데요.’ 였다.


지진이 오면 내진 설계상 아파트는 고층일수록 더 휘청거리며 흔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주에 살지 않으니까 경주에 사는 나보다 훨씬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는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로 시대를 잘 만나 지금으로는 어림도 없는 스펙으로 대학교에 입사해 20년 넘게 정규직으로 근무하고 있는 50대 남성이었다. 첫 직장생활, 힘듦의 절반 이상이 그가 원인이었다. 거의 매일 엄마와 J에게 그  사람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 받는다고 성토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여기까지 적은 후 화가 다시 치밀어서 글을 더 적을 수 없었다. 여러번 글을 썼다 지웠다 다시 쓰길 반복했다. 가능한 내 문장이 분노로 가득차지 않길 바라며 호흡을 가다듬고 쓴 문장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결국 며칠이 지나서야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편의상 그 분을 F라고 하겠다. F의 성희롱 대상은 교직원 뿐만이 아니었다. 교수여도 여성이면 희롱의 대상이었다. 희롱의 내용을 차마 자세히 쓸 수는 없지만, 그 당시 너무 충격을 받았고 부하 여직원 앞에서 서슴없이 성적 판타지가 드러나는 언사를 내뱉는 모습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동시에 서글퍼졌다.


‘여자는 교수여도 저런 아재에게 성희롱을 당하는구나.’


J는 나보고 계속 더 공부해서 교수도 하고 총장도 하라고 했다. 내가 총장을 한다 해도 희롱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F도 그 분이 교수이기 때문에 앞에서 대놓고 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대학 교직원의 민낯


대학교 교직원은 보수적인 집단이다. 직무에 여자가 할 일, 남자가 할 일이 굉장히 명확하게 정해져있다. 기획, 재무, 인사, 구매는 남자가 할 일이었고, 학사, 연구비 관리, 비서는 여자가 할 일이었다. 학사 담당자 회의가 열리면 열에 아홉은 여자 선생님이었고, 한 명 정도만 남자 선생님이었다. 이런 구성은 팀장급 구성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학사업무가 주를 이르는 학과 행정팀, 그리고 대학 본부에서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국제팀 정도 여자 팀장님이 대부분 자리잡았다.


이제는 어떤 교직원 채용공고를 보면 아, 여자 안뽑겠네 하고 아예 지원조차 하지 않는다. 그게 서류준비하는 데 괜히 나의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지름길이었다.


서울은 지방과 다를까? 서울로 이직 후 만난 분들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이고 노동자의 권리에도 관심있으며, F에 비하면 젊고 스마트했다. 그러나 정규직, 비정규직 통틀어 지금까지 육아휴직을 낸 교직원이 손에 꼽힌다고 했다. 퇴사 아니면 출산휴가 단 3개월만 쓴 후 복귀했다고 한다. 남자 교직원은 육아휴직의 ‘육’자조차 꺼낼 수 없다.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대학 교직원의 민낯이었다.







그에게 화를 내고 퇴사한 , 평생 칭찬해


F는 당연히 성희롱뿐 아니라 ‘너 나 무시하냐’를 탑재한 전형적인 아재였다.


“내가 본부 사무실 가면 말이야. 다들 일하다가도 일어나서 나한테 인사해!”


그리고 어느 겨울이었다. 팀장님께는 한 차례 퇴사하겠다고 말씀드렸고, 6개월만 더 버텨보라는 말에 알겠다고 했다. 겨우 버티는 중에 F가 ‘너 나 무시하냐’ 하는 말에 꼭지가 돌아 다다다 쏘아붙였다. 내가 언제 무시했냐고. 당신이 잘못한 걸로 왜 나한테 뭐라하냐. 얼굴이 시뻘개지며 1, 2, 3, 소리지를 타이밍에 팀장님이 F를 사무실에서 끌어냈다. 쟤 사표낸다는 거 겨우 달래놨어.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 같았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어른이니까, 직장상사니까 나한테 그래도 된다고? Fuck——you! 진작 참지 말고 화낼 걸. 삭힐대로 삭혀진 체증들이 씻겨내려갔다.


3개월 후 결국 나는 사표를 던졌지만 그에게 화 한 번 내보고 퇴사했기에 후회없는 사표였다. 용감했던 과거의 나, 평생 칭찬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