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여행을 다녀오면 견문이 넓어지고 어쩌구 같은 말을 싫어한다. 견문이란건 새로이 보고 들은 경험의 총 양과 비례한다. 당연히 여행을 가면 다 새롭고, 그러다보니 뭔가 더 성장하는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이 말을 조금만 비꼬면, 도서관에 가면 지식이 늘어난다는 것과 같은 무게감이다. 도서관 간다고 뭐가 달라져, 책을 읽어야 도움이 되지. 마찬가지다. 여행을 간다고 뭐가 달라져, 뭔가를 얻어야 달라지지.
1.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그랜드 캐니언보다 을지로 3번출구에서 더 많은걸 얻을 수 있는 사람이다. 여행에 원래 부정적이다. 그냥 재밌고 즐겁고 신나고 끝이면 이해가 가지만, 성장이라고 치면 글쎄. 성장이 그렇게 쉽고 간단했으면 패키지 여행 중 초중고 과정이 있지 않을까. 언어 유학 같은거 말고, 견문 넓히기 유학으로다가. 한달 패키지로 다녀오면 뭔진 몰라도 성장해 올거 아니야. 그렇게 뭐 다들 극찬하는데 대치동은 뭐하냐 이거야. 지금 영어공부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 사람들이 제일 추천하는 인도부터 보내야 한다. 그런데 안 보내는 이유가 뭘까, 그냥 좀 많이 쎄게 얘기하자면. 여행 가서 뭔가를 얻어온다는 말은, 비싼 돈 들여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마음의 위안이다. 몇천만원이나 썼는데 그냥 재밌고 맛있고 신기하고 끝이면 조금 아깝잖아. 나는 성장했다. 어떻게든 이 기분을 느끼고 싶지만, 한국으로 돌아오고 두달 세달이 지나도 느껴지는건 없다. 그러니 발버둥치듯 이야기한다. 사람은 여행을 다녀와야 해!
2.
이건 여행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어, 같은 이야기가 아니다. 당장 나만 해도 간의 16박 17일간의 해외 여행을 끝내고 꽤 많은 것이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여행을 다녀와서가 아니다. 나는 어딜 가도 뭔가를 건질 수 있는 사람이고. 그게 이탈리아였을 뿐이다. 굳이 여행을 다녀와야 해를 대체해서 뭐라도 말해야 한다면. 사람은 경험에서 최대한 많은걸 얻어야 해!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나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뭘 얻었나. 선물용 마그넷과 이런 저런 조미료, 소스, 맛있는 음식의 기억, 여러가지 풍경 정도. 이걸 위해서 여행을 다녀와야 한다면, 난 조금 부정적이다. 물론 최고의 기억들이지만 수백만원을 쏟아 부을 정도의 경험이라곤 보기 힘들다. 단 돈 만원이면 왓챠 한달 결재가 가능하고, 본 슈프리머시 한편만 봐도 손쉽게 황홀함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행에서 취해야 할 자세는 무엇일까. 이렇게 손쉽게 수많은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세상에서. 직접 두 눈으로, 두 발로 뛰고 보며 여행을 다녀와야만 하는 이유가 뭐가 있을까.
3.
얼마전 기록 예찬이라는 글에서도 썼지만. 기억은 휘발된다. 휘발된 기억을 붙잡기 위해서 매체가 있고, 사람들은 끊임 없이 음악으로. 글로. 그림으로. 영상으로 기억을 보존한다. 걸어서 세계속으로를 보며, 발칙한 유럽 여행기를 읽으며 나의 여행을 떠올린다. 그러면 혹시 만약에. 그 기억들이 타인들로 인해서 보존된게 아니라, 직접 담아놓으면 어떨까. 그곳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정리해서 예쁘게 담아놓는다면. 영상을 찍고 글을 쓰고, 당시의 감정을 기록하고 이후에 변화된 나를 표현한다면. 그럼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단순히 보고 듣고 즐기는 여행에서. 영화와 에세이를 만들어내기 위한 훌륭한 자료 조사 과정이 되는거다. 여행이 자료조사라니. 뭔가 좀 극단적으로 낭만이 없지만, 나같은 여행 비관론자에겐 더할나위 없는 구실이다. 여행을 왜 가?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건 일상 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얻을 수 있어. 하지만 일상 생활에선 이런 영상을 만들어내지 못하지.
4.
결국 난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16박 17일간의 이탈리아 여행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에세이로 풀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향후의 모든 여행도 이런 형태로 기록할 것이다. 이건 어찌보면 그 서문과도 같은 글이었는데, 뭐 아님 말고 식으로 넘어가기 싫어서 선언하고 싶었다. 나 이런거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