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장비를 사기 두달 전 부터 검색하는 타입이다. 사람들의 평가는 어떻고, 이걸로 찍은 영화는 뭐가 있고, 유명한 감독들 중에 이 캠코더를 쓰는 사람은 없는지. F값이 얼만데 최대 개방때의 주변부 화질은 어쩌구 저쩌구. AF는, 픽쳐 프로파일은, 배터리는, 그립감은, 결국 마지막엔 렌탈샵에서 대여해서 만져보고 결정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내 손에 내 장비가 쥐어지고 나면. 보통은 딱 이때부터 질린다. 장비는 책장에 올려지고, 결국 원래 손에 익은 장비를 들고 나간다.
여행도 마찬가지다. 원채 여행을 즐기지 않는 스타일이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것 저것 검색하다 보면 결국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껴버린다. 숙소 사진이나 로드뷰, 음식 사진, 어디 승강장에서 몇번 버스를 타면 되는지. 속으로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다보면 진지하게 내가 여행을 가기 전인지 갔다 온 후인지 헷갈릴 정도다. 상상력이 좋다는 것은 마냥 장점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여행지에 대한 정보 없이 떠나는 것을 즐긴다. 이를 악물고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는다. 인터넷 시대에서 즉흥적인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어쩌면 나같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즉흥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너무 미리 다 체험해버려서 쉽게 질리는 사람. 인터넷을 끊던가 여행을 끊던가 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여행을 끊고 살았는데 신혼여행까지는 끊을 수 없어서, 인터넷을 끊어버렸다. 미소와 나는 아무런 정보 없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어차피 코로나 때문에 해외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고. 진짜 신혼여행은 언젠가 정책이 풀리면 가는걸로 하고, 국내 여행 중에서 풀빌라 하나 찾아보자.
스테이폴리오를 통해 여차저차 경주 숙소를 예약하고, 입금까지 마쳤다. 경주 이야기를 왜 이렇게 대충 하냐면, 얼마 안 있어 코로나 시대의 해외여행 정책이 바뀌어 2차 접종을 마친 사람은 격리 없이 다녀올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신반의 했지만, 사실 미소는 전신이었고 나 혼자 전의였기 때문에 결국 해외로 떠나는 것으로 결정했다. 회사에 시원하게 신혼여행 휴가 5일, 연차 5일을 질러버렸고 팀원들은 나로 인해 일정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무책임한 행동은 2년 전, 하던 일을 팽겨치고 미소를 보러 파리로 갔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런게 우리만 낭만적이지,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는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었다. 하지만 명심할 것은, 인생을 살면서 과감하게 민폐를 끼치기로 결심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용기란, 에그마요 할라피뇨 더 넣어달라고 말할때만 필요한게 아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12박 13일의 일정으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물론 결국 제 날짜에 복귀하진 못했지만, 그건 한참 뒤의 일이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여행 전에 이것 저것 찾아보다가 질리는 타입이지만, 이번 경우에는 그럴 걱정이 없었다. 여행 준비고 뭐고, 결혼 준비가 당장 코앞이니까 신경 쓸 겨를이 없다. 혹시 결혼 끝나자마자 신혼여행 떠나는 커플에게 팁을 드립니다. 준비할거면 결혼 3달 전부터 준비하세요. 결국 우리는 대략적인 동선과 비행기 티켓, 첫째날 숙소까지만 잡아놓고 결혼식 준비에 전념하기로 했다. 동선은 베네치아 마르코폴로 공항에 도착 이후, 피렌체와 발도르챠, 로마, 나폴리를 거쳐 카프리. 아말피. 타오르미나, 시라쿠사, 카타니아 공항에서 복귀였다. 어떻게 보면 이게 이야기의 큰 줄거린데, 미리 스포일러를 하는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도시 이름으로 검색했을 때 노출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해서 넣어봤다. 빌 브라이슨도 이런 것 까지 계산해서 글을 쓰진 못했을것이다. 처음 이야기가 나왔던 도시는 타오르미나였다. 미소가 나름대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보여줬는데, 잠깐 생각해보니까 왜 이탈리아였지? 여행지를 이탈리아로 고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오랜 해외 생활을 보낸 미소가 추천해서 마냥 알았다고 한 것 같다. 지금 와서 뒤늦게 이유를 붙여보자면 영화 리플리와 애니메이션 루카가 나름 큰 이유이지 않을까. 그 중 몇가지 도시를 보여줬고, 우리는 타오르미나에 마음을 뺏겼다. 특히나 나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는 것 보다 하나의 동네에 오랜 시간 머무르는 여행을 꿈꿨는데. 미소는 나의 의견을 완전히 존중해주면서, 나와 함께 가고 싶은 베네치아와 발도르챠. 피렌체와 로마를 꼭 가고 싶다고 해줬다. 그리고 나중에 지도를 보니 나라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에서 끝나는 모험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철원에서 서귀포까지 차타고 가는 일정이다. 뭔가 잘못된건 아닐까, 걱정하긴 했지만 결혼식 준비로 바빠져 여행 준비는 또 뒤로 미뤄졌다.